성균관대학 법정대학장으로 재직하며 (81회)
  제12장 애증의 시대와 세월

1968년(52세) 1월 21일은 일요일. 일요일이면 당연히 매주 참가하는 등산멤버들과 함께 정능 뒷산에 올라갔다. 험한 능선을 따라 올라가 문수사 부근에서 점심을 만들어 먹고 내려오는 것이 이날의 예정이었다.

북한의 무장 게릴라가 휴전선을 넘었다는 정보가 있음을 일행인 장자룡 씨가 알려 주었고 그리고 산을 뒤지는 헬리콥터의 소리가 요란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별로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계속 올라가 문수사에 도착하였다. 나는 절 위에 있는 큰 바위 밑에 가서 밥을 해먹자고 주장하였으나 일행들은 다리가 아파서 올라가기 싫으니 절 밑에서 먹자고 반대 하였다.

특히 아내가 선두에 나서서 반대하였다. 할 수 없이 나는 그들의 의견을 따랐고 우리 일행은 아무 일 없이 하루의 산행을 끝마치고 내려 왔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바로 그 때에 문수사 위에 있는 큰 바위 속의 암굴에 그 무장 게릴라들이 숨어 있었으며 저녁이 되자 그들은 세검정을 거쳐 청와대를 습격하였던 것이다. 그들 일당 중에서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에 의하여 이런 사실이 알려졌고 이것이 그 유명한 1.21사건이다. 만일 그 때 내가 고집을 부려 우리 일행을 그 바위 밑에까지 끌고 갔더라면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만 해도 오싹해 진다.
 
▲ 1.21사태에 대한 동아일보 호외 91968. 1.22.)

오랫동안 중풍으로 고생하시던 선친께서 2월26일에 혼자 걸어서 명륜동에 있는 우리집을 찾아오실 정도로 많이 회복되셨다. 1월26일에 경기여중을 졸업한 남채가 3월5일에 경기여고에 입학하였다. 중앙일보 기자로 있던 영준이가 홍진기 사장의 배려로 삼성물산으로 3월8일자로 전직하였다. 그에게서 기자냄새가 나는 것이 싫어서 내가 홍군에게 부탁해 놓았던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조선일보사 뒤에서 유무형 군의 법률사무소를 빌려 쓰고 있었으나 4월8일에 무교동에 새 사무소를 꾸려 단독으로 변호사 업을 계속하였다. 법정대학의 학장으로 있으면서도 변호사 사무실을 유지할 수 있도록 권오익 총장과는 합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서울법대 제자인 전태봉군이 열심히 뛰었으므로 수임사건도 많아졌고 따라서 수입도 괜찮았다.

9월 15일 독일에서 웅이가 영채와 결혼하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런데 그 다음날인 9월 16일에 웅의 부친이신 공증인 김덕준 씨가 졸도하셨다. 따라서 나는 그 분과는 상의하지도 못하고 허락한다는 회신을 독일로 보냈다.

그리고는 동백림사건으로 서울에 끌려와 있다가 풀려나 다시 독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윤이상 씨를 서울대병원으로 찾아가 영채에게 패물을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윤 씨의 부인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윤 씨가 김웅 군의 일이니 책임지고 전달하겠다고 응락하였다. 윤 씨는 나중에 독일로 귀화하였고 또 친북으로 전향하였다.

이리하여 영채는 마침 독일에 가 계시던 김증한 교수의 주례로 그 곳 대사관에서 10월 12일에 결혼식을 가졌다. 김 교수의 부친 김익진 씨와 웅의 부친과는 아주 친교가 있으신 분들이었다.

보통 나는 아침 9시에 출근하여 교무처장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학장으로서 해야 할 사항에 대하여 결재를 하고 10시가 되면 무교동에 있는 법률사무소에 들려 필요한 서류를 챙겨가지고 법원으로 가서 소송에 참석하였다가 오후 3시경 다시 성균관대학교로 돌아와서 일을 본 다음에 다시 무교동으로 가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특히 학생들의 반정부 데모라도 있는 날이면 나는 정신없이 뛰어야했다. 소송 도중에 연락을 받아 급하게 대학으로 뛰어간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마다 택시를 잡아타야 하는데 그 때만 해도 택시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때마침 현대자동차에서 신차인 코티나를 시판하고 있어 그 차를 사기로 하였다.

12월 26일 아내와 함께 울산으로 가서 1박하고 다음날 차를 인수해 가지고 올라왔는데 처음에는 시속 20km로 올라오면서 김천에서 1박 하였고 그리고 수원까지 그런 속도로 오다가 여기서부터는 마침 완공된 고속도로로 들어서자 제 속도를 내면서 12월28일 저녁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대학 교수로서는 거의 최초로 자가용 자동차를 가지게 되었다. 자동차 번호는 2.626.
 
차를 사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서울에 올라오는 길에서 미국 우주선 아폴로 8호의 소식을 들었다. 12월25일 아폴로 8호가 달 주위를 한 바퀴 돌고 12월28일에 다시 지구로 돌아온 것이다. 현대 회장 정주영 씨의 동생 정인영군은 나의 법대 제자였다. 그는 독일에서 익사하였는데 정 회장은 평소에 나를 매우 좋아하였고 코티나 차량을 인수할 때에도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1969년(53세) 작년과 별로 다른 것이 없는 평범한 1년을 또 보냈다. 이렇다 할 큰 사건도 없었다. 1월 18일 영채의 시아버지 김덕준씨가 별세하셨다. 1월 30일 영채가 본에서 딸을 낳았다. 본에서 낳았다고 해서 봉이(보니)라고 이름 지었다고 알려 왔다.

2월 26일 무궁화가 서울미대를 졸업하였다. 졸업식장에서 경희를 먼발치서 보았으나 인사는 없었다. 영준의 애인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7월 11일 형법총론(4정판)을 쓰기 시작하여 9월 20일에 끝냈다. 12월19일 법문사에서 출판하였다.

7월 16일 영채가 보니를 데리고 잠시 서울에 왔다가 9월 10일 다시 독일로 갔다. 7월 21일 아폴로 11호가 사람을 태우고 사상 처음으로 달에 도착하였다. 이 광경을 TV중계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이 날을 임시 공휴일로 선포하였다.
 
11월 20일 대구에 내려가 영남대학교에서 주최하는 명사초청 강연회에서 강의하였다. 12월 5일 영준과 경희의 약혼식이 세종호텔에서 이한기 교수의 주례로 치러졌다. 1970년(54세) 3월 2일에 옥채가 이화여고에 입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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