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들의 출생과 집필 활동 (82회)
  제12장 애증의 시대와 세월

5월 10일에는 서울대학교 총장 최문환 박사의 주례로 영준과 경희의 결혼식이 거행 되었다. 조선호텔은 1층에 새로이 커다란 연회장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결혼식이 올려 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결혼식을 끝내고 두 사람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미리 진양아파트에 두 사람의 살림방을 마련해 놓았으므로 여행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곧 바로 그 아파트로 가서 살림을 차렸다. 나와 아내가 상의하여 경희에게 시집살이를 시키지 안하기로 한 것이다.

그 간 나는 중앙정보부 차장 김치열씨의 노력으로 몇몇 교수들과 함께 그곳에서 하는 일에 자문을 맡아오고 있었다. 우리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이문동에 있는 정보부 별관에 모여서 정보부가 해결해야 할 정치적 안건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 왔었다. 그런데 정보부에서는 그러한 우리들에게 위로여행을 시켜주기로 한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일본 오사까에서 거행된 EXPO 70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나는 8월 5일 아내와 함께 오사까에 가서 엑스포를 구경하고 이어서 오사까성, 나라시, 법륭사 등을 돌아본 뒤 일본이 자랑하는 신간선을 타고 동경으로 갔다. 이봉국은 동경에 없었고 그의 처 박현희 만이 있었는데 그의 안내로 우리들은 아타미온천, 도조왕궁, 화엄 폭포등을 구경하였다. 나는 8월 14일 먼저 귀국하였고 이선은 박현희가 사주는 전자제품을 가지고 8월 17일에 돌아왔다. 그런데 이것은 아내의 마지막 외국여행이 되었다.

무궁화는 정신수양을 위해서 8월 22일 송광사로 내려가 9월 13일까지 있었다. 틈틈이 시간을 내어 많은 주렴을 목각하였는데 이것들은 아직도 이 절의 여러 건물에 걸려있다. 무궁화의 공덕과 실력이 대단하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경봉스님의 글을 목수였던 구산스님 형님의 도움을 받으며 하루 종일 판각을 하였다. 목각을 가르쳐준 분은 무용스님이다. 선방인 수선사와 그 옆 건물인 설법의 기둥에 걸려 있다.

12월 5일에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특별한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대학 학장이라고 해서 준 것이다.

집을 사기 위해 한일은행으로부터 대부 받은 돈이 600만환 있었는데 12월 28일에 그 빚을 모두 갚았다. 조금씩 여러 해에 걸쳐 모두 갚은 것이다. 이 해에 나의 머리는 맹렬히 활동하여 집필도 많이 하였다. 그 중에서 굵직한 것을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 1월 28일에 법철학강의 1,200매를 탈고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6월 15일 박영사에서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법철학에 관한 저서의 모체가 되는 것으로 지금은(1987년) 그 4정판이 나와 있다.

2) 1월 29일에 세계사에로의 귀로 207매를 써서 신동아 지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증보되어 12월 24일 <復歸>라는 이름으로 926매로 늘려졌고 여기에 추가로 내용을 첨가하여 휘문출판사로 넘겨졌다가 1971년에 <무엇이돌아오나>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여기에 나타난 복귀사상은 더욱 다듬어져 1975년에 <복귀(삼성출판문고)>가 되었고 1984년에는 마지막으로 <창조주의 복귀>가 되었다. 이와 같이 나의 필생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복귀사상은 1970년 초에 싹트기 시작하여 15년 만에 완성된 것이다.
 
창조주의 복귀.jpg

 
3) 정도와 우상숭배 98매. 단불교 총문집 게재.

4) 막스 웨버의 생애와 사상 158매. 휘문출판사 간행.

1971년 (55세) 나는 4년 동안이나 법정대학장직에 있었으므로 작년 말에 사표를 내고 있었는데 1월 28일이 되어서야 겨우 그것이 수리되었다. 후임 학장은 김기선 교수가 임명 되었다. 변호사 업은 그대로 계속하였다.

2월 11일에는 밀려오던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부채 없는 몸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은 모두 까닭이 있는 사람들이며 마치 병원을 찾는 사람이 환자인 것처럼 그들은 대개가 불행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을 매일 상대하다가 보니 인간 사회의 추악한 면만 눈에 띄어 인생에 환멸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드디어 10월 31일에 법률사무소의 문을 닫았다. 돈도 좋지만 그러나 좀 더 밝은 세상에서 살고 싶었던 것이다.

2월 8일부터 11일까지 무궁화와 남채가 송광사에 가있었다. 1월 13일 경기여고를 졸업한 남채는 3월 2일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교에 입학하였고 그리고 무궁화는 3월 15일에 독일로 갔다. 해산을 앞둔 영채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2월 20일(음 1/25) 사시에 경희가 아들을 순산하였다. 2월 22일 나와의 첫 대면. 2월 25일에 청운동 김재환 씨에게 부탁하여 윤상이라고 이름 지었다. 3월 13일에는 증조부모님과 윤상의 첫 대면이 있었고 6월 12일에는 윤상과 증조부모님, 조부모 그리고 친부모까지 4대가 모여 첫 카메라 사진을 찍었다. 8월 2일에서 4일까지 조부모, 부모, 윤상이 함께 대천에 가서 해수욕을 하였다. 윤상은 우리 집안의 장손이므로 그의 출생으로 집안이 활짝 밝아진 것이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코티나 차를 새로이 국회의원이 된 이해원에게 주고 7월 15일 125만원을 주고 피아트차를 구입하였다. 7월 28일에 백과사전 Encyclopedia America의 전질을 기증 받았다. 한국에 대한 판촉으로 명사 몇 분에게 무료로 증정하기로 한 모양인데 그 중에 내가 낀 것이다.

8월 5일 영채가 본에서 딸을 낳았다. 경화라고 이름 지어 보냈다. 8월 24일에 웅이가 보니를 데리고 일시 귀국하였다가 10월 9일에 다시 독일로 돌아갔는데 그 간 KIST와 교섭하여 취직을 확정지었다. 그간 독일에서는 영채와 무궁화 그리고 경화가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건강하셨다. 그리고 8월 5일에서 21일까지는 도봉산 밑에 있는 쌍용사에 가서 피서를 즐기기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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