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김대중 김영삼 양 김씨와의 갈등 (91회)
  제13장 공직생활1

1월 26일은 일요일 친구들과 도봉산에 오르던 중 산중에서 무궁화로부터 연락을 받고 곧 하산하여 옷을 갈아입고 청와대로 갔다. 대통령은 이번 투표에 관한 검찰 대책비로 또 1.000만원을 주었고 나 개인에 대하여도 300만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약 20분 동안 단 둘이서 대담하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지식인의 생리와 그들을 다루는 방법에 관하여 말하였고 대통령은 이에 동감이라고 하면서 국민투표가 끝난 다음에 이 문제를 한번 본격적으로 다루어 보자고 말하였다.

대담을 끝낸 후에 곧 대통령은 골프를 치러 가고 나는 우이동에 계시는 아버님을 찾아가 문후를 드렸다. 국민투표로 세상은 시끄러웠지만 권력의 핵심부는 이처럼 평온하였던 것이다.

다음날 나는 검사장회의를 소집하였다. 장소는 장관실이었고 김종경 차관과 서정각 검찰국장이 배석하였다. 장관 훈시를 한다음 검사장 600만원, 대검찰청 300만원, 법무부 400만원의 비율로 대책비를 지급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검사장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1) 검찰의 명예를 위하여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자유분위기 만은 보장해야 한다.
2) 검찰은 어디까지나 소극적 자세를 취해야 하며 말썽이 생겨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한다.
3) 선거관리위원회의 고발이 없는 한 검찰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
4) 법무부장관의 해명기사에도 불구하고 국민투표 거부선동자는 처벌하지 않을 방침이다.
5) 모든 지령은 구두로 하며 문서화하지 않는다.

그런데 국민투표에 관해서는 해외에 나가있는 김대중 씨와 신민당 총재 김영삼 씨에 의한 맹렬한 공격이 있었다. 1월 25일에는 김대중 씨의 극렬한 정부공격 담화가 발표되었고 또 미국에서 귀국하는 도중에 동경에 내린 김영삼 씨도 대통령을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이리하여 1월 28일에 청와대에서는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박경원 내무, 법무, 이원경 문공, 신직수 중정부장,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 유혁인 청와대 정무 제1수석비서, 정상천 청와대 정무 제2수석비서, 김영관 중정 판기국장, 박준규 공화당 정책위의장, 길전식 공화당 사무총장, 구태회 유정회 정책위의장. 이상 13명.

이 자리에서 중정측은 어떻게 해서든지 양김 씨를 입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나는 반대로 그 사람들을 입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여 맞섰다. 처벌법규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오랜 논의 끝에 양 김 씨를 불문에 붙이자는 나의 주장이 결국은 대책회의 방침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내무와 법무 두 장관의 이름으로 경고조의 담화문을 내기로 하였다. 처벌법규가 없다는 나의 주장이 참석자들에게 자극을 준 모양이다.

그 후 어디서 발의되었는지 모르지만 형법개정안이 제출되어 국회에서 통과되었는데 형법 제 104조의 2(국가모독죄)가 75년 3월 25일 자로 신설되었다. 외국에 나가서 대한민국을 모욕, 비방 등의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다. 이 처럼 처벌법규가 신설된 다음에도 김대중과 김영삼 씨 등은 외국에 나가서 모독적 발언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정부에서는 형법 제 104조의 2를 적용하여 그들을 처벌한 일은 없었다.
 
▲ 국민투표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김대중, 김영삼 씨의 입장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 (1975. 2.12.) 

1월 29일에 김영삼 일행이 귀국하였다. 그런데 어제 대책회의에서 나의 주장이 채택된데 대하여 중정 측에서는 이를 못 마땅하게 여겨 나에게 새로운 제의를 해왔다. 즉, 중정의 모 국장을 통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오늘 김영삼 씨가 김포에 도착하면 필시 성명을 발표할 터인데 이것을 입건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나의 대답은 결연하였다. 어제의 대책회의에서는 김영삼 씨의 발언을 불문에 붙이기로 결정했고 또 아직 그 사람은 김포에 내리지도 않았는데 앞으로 있을 성명서 발표를 놓고 미리부터 처벌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하였다.

오후 4시경에 김치열 검찰총장이 장관실로 와서 중정 측을 비난하는 말을 하였다. 그 말에 의하면 중정 사람들이 김일두 서울지검 검사장과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김영삼을 입건하라고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이 강요가 통하지 않으니까 직접 나에게 전화를 걸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오후 5시 경에는 중정부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어제의 대책회의에서는 김영삼을 입건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만, 아까 2시에 각하에게 불려가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앞으로 장관께서 각하 앞에 가실 때에는 이 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겁을 주었다.

그리고 오후 6시 30분 청와대에서 회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중정부장은 아까 4시에 김포에 내린 김영삼 씨의 귀국성명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 하였다. “나는 국민투표 거부투쟁을 60만 당원과 국민 앞에 서서 범국민적으로 강력하게 전개할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한다.”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법적으로 문제될 것 같다고 지적하였다. 이 말을 들은 대통령은 나를 한번 힐끗 보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법은 잘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도 이것은 입건대상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안 그렇소? 법무장관!”

나는 그저 그렇다고만 대답하였다.
 
그러나 나는 안심 할 수가 없었다. 당시의 나의 일기를 보자.
 
 1. 30. /  아침의 대책회의를 끝내고 법무부로 돌아와서 전국의 검찰에 지령을 내렸다 : (김영삼, 김대중의 언동을 입건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곧 입건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을 것) 이것은 중정 측의 계략에 의하여 법무부가 꼬투리를 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대통령의 신임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너무 많아 나는 살얼음 판위를 걷는 것 같다. 무엇 때문에 나는 장관이 되어서 이 고통을 받고 있는가.
 
1. 31. /  국민투표안이 공고 된지 10일째가 된다. 약 반이 지나간 셈이다. 그러나 그간에 위반사범은 겨우 7건 뿐이고 그것도 훈방, 경고 깜에 불과하다. 참으로 평온한 속에서 하루하루가 지나간 것이다. 그래서 입건이니 구속이니 하는 말은 쑥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중정의 젊은 국장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내가 의연한 자세를 견지해 온 것은 백번 잘한 일이다. 신민당도 내분 때문인지 또는 선제 당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맥이 풀려 강력하게 나오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양일동 씨도 속수무책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정부에 유리한 외신이 자꾸만 들려오고 있다. 북괴의 땅굴이 또 하나 발견되어 금명간 공개리에 터뜨릴 모양이다. 이것은 득표를 위해서는 결정판이 될 것이다. 사태가 이러하니 이번 국민투표는 .그저 조용하게만. 끌고 가면 될 것이다. 절대로 강압해서는 안 된다. 공명정대하게 끌고 가서 후유증이 없도록 해야 한다. 중정도 이제는 나의 전망에 동의하게 된 것 같아 다행한 일이다.
 

 
  국민투표 ㅡ 겁주기 작전 (90회)
  겁주기 검찰간부회의 (9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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