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고보에 입학은 하였지만 나는 늘 잠자는 생활만을 계속하였다. 김봉관은 일본인학교인 평양중학교에 그리고 김원찬은 사립인 숭인상업학교에 들어갔으므로 그들과는 자주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한 관계로 처음의 몇 달은 평범하고 고독한 나날을 보냈다.
하루는 방과 후에 화학실험실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플라스코 병에 하얀 액체가 들어있는 것이 눈에 뛰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이 물인 줄 알고서 그것을 마시려고 입에 갖다 대고 빨아보았다. 그러나 그 액체가 진액처럼 무거워서 잘 빨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반대로 그것을 세차게 불었다. 그랬더니 그 속에 있던 액체가 앞에 서있던 황인환(현 명예강동군수)군의 잔등에 쫙 뿌려졌다. 나는 그 플라스코를 제 자리에 놓고서 다른 곳으로 갔다.
다음날 학교에 나와 보니 황인환 군의 교복에는 수십군데의 구멍이 뚫어져 있었고 이 구멍들은 실로 하나하나 끌어매어 놓았음이 눈에 띄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나는 그날 방과 후에 다시 화학실험실에 내려가 그 플라스코에 들어 있는 액체를 확인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용기의 어딘가에 농유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농축된 황산이라는 뜻인데 어제 내가 그 플라스코를 빨았을 때에 만일 그 속의 액체가 나의 입에 들어갔더라면 나는 그길로 죽든가 또는 병신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오싹하는 순간이다.
1학년에 입학한 봄 어느 날 나는 오래간 만에 만난 김봉관과 함께 대동강 변을 걸었다. 전금문을 지나 그대로 북쪽으로 올라가 주암산 방면으로 걸어가면서 두 사람은 계속해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봄이 되어서인지 몸도 나른하여 우리들은 더 이상 걷기가 싫어졌다. 강변을 따라 계속가면 동네가 나오고 거기에서 산등성이를 끼고 되돌아오면 모란봉으로 오게 되는데 우리는 그 동네까지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 동네 못 미쳐서 왼쪽을 바라보니 60도 정도로 경사진 수성암벽이 보였다. 암벽은 빤질빤질 하였으나 기어오를만 하였고 그곳으로 올라가서 모란봉 뒷길로 가면 길이 크게 단축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그 암벽을 기어 올라갔다. 그러나 약 20m가량 올라가니 그 암벽의 경사가 점점 높아져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크게 당황하였다. 올라갈 수도 없고 내려갈 수도 없으며 밑에는 석재가 삐죽삐죽 쌓여 있어서 밑으로 굴러 떨어지면 틀림없이 죽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어떤 동네 아주머니가 우리를 보고 달려와 손짓을 하면서 소리를 질러대며 얼마 전에도 어떤 아이가 거기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크게 다쳤는데 너희들 어쩌자고 거기에 올라갔냐고 안달을 하였다. 우리들은 무서워지기 시작하였다. 엎드린 자세로는 절대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얼마동안 그대로 있다가 내가 봉관이에게 말하였다. ʻ너 그자세로 신발과 양말을 벗을 수 있겠니?ʼ 김봉관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우리는 암벽에 붙은 채로 발로 운동화와 양말을 벗어서 아래로 내려 보냈다. 그리고는 ʻ여이, 땅ʼ하고 동시에 외치면서 엎드린 자세에서 반대 자세로 몸을 뒤집었다.
발바닥과 손바닥을 암벽에 찰싹 붙이고는 그대로 붙어 있을 수가 있게 되자 발과 손을 교대로 밀어 내면서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이리하여 얼마 후에 우리는 무사히 밑으로 내려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부인은 말없이 사라져 버렸고 우리는 땅위에 앉아서 한 동안 휴식을 취하였다. 그리고는 양말과 신을 신고 막 자리를 뜨려는데 돌 틈에서 나오는 뱀 한 마리를 발견하였다. 우리는 달려가서 그 뱀을 때려잡아 나무가지를 꺾어 그 나무에 뱀을 끼웠다. 그랬더니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뱀 같이 보였다.
우리는 유유히 그곳을 떠나 모란봉을 거쳐 시내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뱀 막대기를 휘두르면서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놀려댔다. 놀라서 소리 지르며 달아나는 여학생을 보면서 우리는 신이 났으며 이렇게 하루 종일 날이 저물 까지 평양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비록 중학교에 입학하였다고 하나 우리는 아직도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장난꾸러기에 지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