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은 여전히 영등포에 있는 타이어공장의 관리인으로 매일 근무를 하셨는데 여기에서도 또 말썽이 생겼다. 그 당시 타이어공장은 시설만 번듯했지 사실상 시내에 자동차가 없으니 매출이 형편 없었다. 그래서 선친께서는 뛰어난 경영력을 발휘하시어 자동차 타이어 대신에 시중에 많이 있는 자전거와 리어카의 타이어를 생산하여 난관을 극복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선친은 친구였던 김태길 씨를 직원으로 채용하여 같이 일하고 있었다. 그의 동생 김태선이 미군정 경무부(부장은 조병옥)의 수사국장으로 있었는데(나중에 자유당 정권 때 서울시장이 됨) 타이어 공장에 탐이 난 김태길은 그의 동생을 시켜 트집을 잡아 선친을 구속토록 하였다. 이유인즉 자동차 타이어가 아닌 자전거 타이어를 생산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나는 곧 경무부로 찾아가 이리 저리로 뛰어 다닌 끝에 다행히 경무부 차장으로 있던 최경진(최필립 씨의 선친)씨를 만났다. 그는 나의 고등시험 선배였으므로 간곡히 부탁을 해서 겨우 석방 되었으나 그 대신 타이어 공장의 관리인 직은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부터 선친의 남은 생애는 완전한 공백기에 접어들게 된다. 공산 정권이 싫어서 남하한 이북 피난민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업에 뛰어 들어 경제 질서가 극도로 혼란하고 치열했던 당시에 선친과 같이 정직하고 점잖은 사업가는 도무지 발을 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몇몇 사업에 손을 대 보기는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고, 6. 25가 나고 부산으로 피난 가 서면에서 사시다가 다시 환도 하였으나 끝내 손에 맞는 사업은 주어 지지 않았다.
그러나 구왕궁 관리국장이던 윤우경 씨의 권유로 한때 선친은 창경원내 장서각에서 근무하기도 하였다. 선친은 이곳에 소장된 수 만권의 책들을 하나하나 정리하여 도서관 다운 장서각을 만드셨다. 이로 인해 각계각층에서 많은 칭송을 받으셨는데 평생 책을 좋아하시던 선친은 여기에서 그 한을 풀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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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경원 장서각 건물 전경 / 6.25 직후까지 선친은 마음에 맞는 사업을 찾지 못하시다가 창경원 장서각에서 근무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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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계시는 동안 선친은 정부에서 연구비를 받아 이씨왕조의 제사라는 책을 내셨고 아산의 현충사를 지을 때에는 고증 업무를 맡아 보기도 하였으며, 그리고 조선의 복고라는 원고도 남겨 놓아 나중에 서울대학교로 옮겨간 규장각(옛 장서각)에 기증하였다.
5,16 이후에도 계속해서 장서각에서 일을 보시다가 70세가 넘으면서 부터 부득이 그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 월급 봉투를 들고서 이것이 나의 마지막 수입이라고 서운해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말년에 선친은 을지로 집을 팔아 정능에 집을 하나 마련해서 막내 건의 식구와 함께 사셨고, 남은 돈은 원에게 주어 집을 사도록 하셨는데 나중에 선친은 다시 우이동과 쌍문동으로 이사하셨다. 그리고 매년 여름이 되면 두 분 부모님은 더위를 피해 서울 근교의 집에서 한 계절을 보내셨는데 1973년 여름에도 두 분은 도봉산 망월사 밑에 있는 작은 암자에서 더위를 피하고 계셨다.
9월이 되도록 두 분은 내려오지 않으셨는데 10월 들어 어머니가 갑자기 연탄가스에 중독되셨다. 급히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하여 산소탱크에서 치료받고 며칠 후에 퇴원하였으나 한 달이 채 못 되어 다시 의식을 잃으셨고 11월 30일(음력 11월 6일) 아침 6시 30분에 어머님은 세상을 뜨셨다. 향년 77세. 12월 2일에 벽제에서 화장하여 유골분은 한강에 뿌렸으며 칠보사에서 사십구제를 지냈다.
그 후 선친은 막내와 함께 우이동으로 이사하셨다. 그러나 외출을 하지 않아 다리가 힘이 없어 보행이 어렵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실수로 인해 얼굴에 화상을 입어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전에는 무궁화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시내 구경도 시켜 드리고 냉면도 대접해 드리기도 하였으나 이런 일이 모두 어렵게 되어 그저 한 달에 한번 씩 선친을 찾아가 잡수실 것과 용돈을 드리고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힘든 상태에서도 선친은 고문진보를 손에서 떼지 않고 열심히 탐독하셨다. 1982년이 되자 급격히 쇠약해 지셨고 찾아간 나에게 이제는 다 된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우석대학병원에 입원하여 간병을 받아 오시다가 드디어 7월 28일(음력 6월 8일) 정오를 조금 넘겨 조용히 운명하시었다. 향년 86세.
동생들의 의견에 따라 화장은 하지 않고 남양주군 모란공원 묘지에 모셨다. 삼청동 칠보사에서 사십 구제를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