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 시절 (9회)

여름 방학이 되자 선호 외삼촌이 와서 나를 데리고 평양에서 서쪽으로 90리 거리에 있는 덩마루(강서군 무본리)로 갔다. 거기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외가집에서 한 여름을 보내고 돌아왔다. 보리밥을 먹기 싫어하니까 외삼촌 어머니(외숙모)가 쌀을 한줌 따로 넣어 나만 쌀밥을 먹여준 기억이 난다.

여기에서는 막내 외삼촌 배선만과 5촌 외숙인 배현택과 주로 놀았다. 콧수염이 있어 히틀러를 닮았다고 해서 히또라(일본식 발음)라고 불리는 현택은 ʼ80년에, 그리고 선만은 ʼ82년에 각각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나하고는 겨우 두 살 터울의 형제와도 같이 지낸 사이였다.

4학년이 되어서는(9살) 일본어 시간에 교과서에 나오는 과수원이라는 제목의 글을 책상에 일어선 자세로 끝까지 암기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이질에 걸려서 학교에 나가지 못하였고 이리하여 1학기 말 시험을 치르지 못하였다. 이때의 우리 식구는 창전리 50번지로 이사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변소를 드나들었다. 그때 마다 변소 벽에 바를 정(正)자를 쓰면서 하루에 몇 차례나 용변을 보았는지를 계산했던 기억이 난다. 형편없이 몸은 쇠약해졌으나 여름 방학이 끝나기 전에 이 병은 물러갔다.

9월이 되어 학교에 나와 보니 제1학기 성적은 전 학급에서 5등으로 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학교 공부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나를 격려 해주기 위하여 선친께서는 나에게 하모니카를 사주셨는데 나중에 나는 이 악기를 아주 잘 불었다.

그리고 이때에 우리 집 옆에는 평양의 갑부 김동원씨가 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둘째 아들 성환이와 친하게 지냈는데 그 때의 우리 두 사람은 비둘기 기르기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께서 새를 기르는 것은 옛날에 상놈들이 하던 일이니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것도 더 이상 계속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 둘은 오영진과 함께 다니면서 영화관 출입을 하였다. 미국의 카우보이 영화,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 그리고 나운규 등이 출연한 우리나라의 영화를 닥치는 대로 보려 다녔다. 입장료는 물론 마련할 수가 없었으므로 세 사람은 몰래 담 넘어 들어가서 보았다. 그러나 어느 날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씨네마라는 극장에 숨어 들어가 보다가 종업원에게 발각되어 호되게 당하고 나서부터는 영화관 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영진은 계속해서 영화 구경을 열심히 다녔고 이리하여 그는 나중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극작가가 되었다. 그의 대표작은 ʻ시집가는 날ʼ이다.

▲ 초등생 시절 친하게 지냈던 극작가 오영진 / 사진은 경성제대 재학 시절이다 (사진출처 / 한겨레신문)

이 무렵 나는 옆집의 개를 놀리다가 그 개에게 다리를 물려 광견병 예방 치료를 오랜 동안 받기도 하였다.

광성학교 5학년(10살) 때의 일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5학년이 끝날 무렵에 나는 상수보통학교 4학년으로 전학하였다. 광성학교는 기독교 계통에서 설립한 사립이었고, 여기를 나와서는 앞으로 좋은 상급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친께서는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하여 학령(의무교육 받아야할 나이)에 맞추어 1년을 손해 보기로 하고 나를 상수학교로 옮긴 것이다. 이때의 우리 집은 상수구리 130번지로 이사가 있었고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상수학교에 가서는 친구가 없어서 큰 고통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학생이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그것을 잠시 빌리자고 하였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김원찬이 끼어들어 자식아 네 까짓 것이 하모니카를 불 줄 알어 하며 트집을 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빌려주는 하모니카를 한동안 신나게 불어댔다. 이때부터 나는 김원찬과 그리고 그와 친한 김봉관과 같이 셋이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우리들은 삼총사라고 자칭하면서 항상 같이 다녔다. 김원찬은 해방 이후에 월남하지 못하였고 김봉관은 나와 함께 후에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농림부 양정국장과 차관보까지 역임했으나 1973년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상수학교 5학년(11살) 때의 어느 날 나는 친구와 함께 장난을 치다가 마침 교실로 들어오는 담임 선생에게 들켰다. 친구가 먼저 종아리를 맞았는데 그는 두서너 대 맞고는 아이고 라고 엄살을 부렸으므로 더 이상 맞지 않았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나는 사내대장부가 이까짓 것을 가지고 엄살을 부릴 수야 있겠는가라고 마음속에 다짐하고서 그저 맞을 때마다 하나, 둘하고 입속으로 계산만 하였다. 그랬더니 그 교사는 무작정 때리기만 하였다. 쉰, 쉰하나, 여든, 여든하나 하다가 나중에는 아흔 다섯, 여섯까지 나갔다. 이러다가는 백을 넘기겠다 라고 생각한 나는 억지로 아이고 라고 한 마디 했다. 그랬더니 그 교사는 얼른 때리기를 멈추었다. 결국 96대를 맞은 것이다. 그날 오후에 나는 대동강에 나가 수영을 하였는데 내 종아리를 보고서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상수학교 6학년 (12살)이 되어서도 나는 3총사와 몰려다니면서 뛰어놀기만 하였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서 부터는 다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평양에서 제일 좋은 평양 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입학시험을 치러야 할지 도무지 궁리가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 끝에 나는 입학시험 지도 참고서를 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어느 날 선친을 졸라서 돈을 타내어 일본인 거리에 있는 책방을 찾아가 마땅한 참고서 한권을 사다가 읽기 시작하였다.

부모님은 생각도 하지않고 계셨는데 나는 혼자서 내가 갈 길을 개척해 나아갔다. 이리하여 몇 달 후에 치러진 평양고보 입학시험에 나는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합격자 명단 계시판 앞에서 할아버지께서 나의 수험번호를 가리키면서 크게 기뻐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리고 나서 상수학교의 졸업식이 있었는데 나의 등급이 전체 졸업생 중에서 2등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서울대 대학원장이었던 박종홍박사는 이 학교의 나의 선배이고 연세대 김동길교수는 나의 후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