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대 영감(靈感) (11회)

여름 방학이 되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모두 시골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평양에는 별로 놀아 줄 친구가 없었다. 강서에 있던 외가집 식구들도 그때에는 평양으로 이사 와서 살고 있어서 나는 할 수 없이 도심지에서 무더운 여름을 보내야 했다. 요즈음과는 달라서 그 당시에는 소위 바캉스라는 것을 일반인은 몰랐다. 그 해의 여름은 특별히 무더웠다. 그래서 나는 9월 1일의 개학날이 되기를 학수고대하였다. 빨리 학교에 나가 친구들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9월이 되자 평양에는 벌써 완연한 가을이 찾아 들었다. 심신이 상쾌해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9월 18일이 되었다. 이날 나는 저녁밥을 먹고서 집을 나와 산책하기 시작하였다. 발길을 따라 학교 쪽으로 갔고 고등보통학교와 부속보통학교 사이 길로 올라가 그 뒤에 있는 만수대까지 갔다. 그리고는 그 꼭대기에 있는 <행행비>라는 비석 밑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를 베개 삼아 벌렁 뒤로 누워서 하늘을 바라다 보았다. 공기는 맑은데 하늘에는 별들이 판자처럼 깔려서 금방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는 풀잎을 하나 뜯어서 입에 물고는 계속해서 상쾌한 기분으로 하늘을 바라 보았다. 큰 별과 작은 별이 수 없이 섞여 있었고 때로는 별똥별이 지나가기도 하였다. 그 광경은 이루다 말할 수 없이 황홀한 것이었다.

불현듯이 나의 머릿속에서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저것들이 과연 무엇이며, 또한 어떻게 생겼고 그리고 지구로 부터는 얼마나 먼데 있는 것일까. 저 별에도 사람이 살고 또 그곳까지 인간이 갈 수는 없는 것인가. 나는 입에 문 풀잎을 질근질근 씹으면서 이런 것들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에 계속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모든 것이 신비스럽고 갈수록 의혹의 덩어리만 더해져 갔다.

그러던 중 문득 학교 도서실에 가면 무언가 길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났다. 도서실의 진열대에는 어린이 과학 잡지인 <자공의 과학> 10월호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 잡지의 표지에 칼라로 된 토성 사진이 실려 있던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 아름다운 토성환을 인상 깊게 보았던 기억이 머리에 떠오르자 나는 그 자리에서 훌쩍 일어나 집으로 뛰어가서 선친께 졸라서 돈을 얻어내어 한 달음에 일본인 거리에 있는 와끼자카 서점으로 가 그 잡지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밤을 새워 그 책을 다 읽었다. 정말로 다음날 아침까지 한 잠도 자지 않고 그 책을 끝까지 읽은 것이다.

▲ 일제시대 평양거리 / 황금정 제 18은행 앞에서 동양척식회사를 바라 본 풍경 (오른쪽 돔을 한 건물이 동양척식회사)

그런데 잡지를 다 읽고 났지만 오히려 나의 실망은 더하여져만 갔다. 어렵기도 하지만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학제에 의하면 1학년에는 산술과 식물학, 2학년에는 대수와 동물학, 3학년에는 기하와 물리학 및 화학 그리고 5학년에 가서야 비로소 삼각법을 가르쳤던 것인데, 이 잡지에는 대수, 기하, 물리화학에 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루트의 SIN, COS, TAN니 따위의 부호가 무수히 나와 있었기 때문에 당시 나의 실력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오히려 고민만 커진 것이다.

다음날부터 며칠 동안 나는 상급생을 찾아다니면서 이것들에 대한 것을 물어 보았다. 그러나 속 시원히 대답해 주는 선배는 한사람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다시 도서관을 찾았다. 창전리의 옛집 옆에 김인정이라는 과부가 사재를 털어 만든 인정 도서관이 있는데 여기에서 나에게 맞는 책들을 구해 볼 수 있었다. 필요한 책들을 골라내어 그 분량을 감안해 가면서 독파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는 매일 저녁에 그 도서관으로 가서 계획표대로 그 책들을 읽기 시작하였다. 완전한 독학을 해나가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 해가 가기 전 3개월 동안에 나는 대수, 기하, 물리, 화학, 식물학, 동물학 그리고 삼각법에 관한 중학교 수준의 공부를 독학으로 끝내 버렸다. 같은 반 아이들은 아직 산술 밖에는 모르고 있었는데 나는 이미 SIN, COS 뿐만 아니라 물리공식과 화학 방정식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해를 넘겨 1학년 3학기가 되자 나는 미분학과 적분학 그리고 해석기하학까지도 공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것들은 당시에는 고등학교나 대학예과에서 가르치는 과목이었다.

새해의 4월이 되어 2학년이 되자 학교에서는 대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나는 벌써 르벡크 적분학, 함수론, 위상기하학등의 고등수학과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é)의 과학논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었다. 동급생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분야에 혼자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나는 독일어와 프랑스어 공부도 시작하였고 그리고는 문학이나 그 밖의 책들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1년 동안에 200권 정도의 책을 읽었는데 이러한 생활을 나는 앞으로 20세가 되기까지 6년 동안 계속하였다. 잠만 자던 철부지 생활에 젖어있던 나의 인생은 1930년 9월 18일 이후부터는 무섭게 변하여 이리뛰고 저리뛰며 정신없이 무엇인가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변하였던 것이다. 나는 평생을 두고 이날 9월 18일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같은 날에 있었던 것중에 1931년 9월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또 1974년 9월18일에는 내가 법무부장관이 된 것 등이 기억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