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고(崔鍾庫)
서울법대 명예교수, 한국인물전기학회장
I
석우(石隅) 혹은 취현(翠玄) 황산덕(黃山德, 1917-1989) 박사는 법학자, 특히 법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형법학자, 대학총장, 문교부장관, 법무부장관, 불교학자, 문필가, 등산가 등으로 관심과 활동이 다양하셨다. 세월이 흘러 탄생 100주년을 맞는 오늘에도 생생한 기억과 함께 많은 의미를 제공해주고 있다.
필자가 서울법대에 재학할 때에는 공직으로 활약하시고 계셨기 때문에 좁은 의미의 사제지간은 아니다. 그러나 전공도 그렇고 여러 조건으로 스승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타당하다. 후배학자로서 선배들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온 필자는 황산덕 선생님에 대하여 크게 세 번의 계기로 글을 쓰게 되었다. 2007년 <한국의 법학자>(서울대출판부)를 낼 때 서른(30) 분의 한국법학자들의 생애와 법사상을 정리하면서 당연히 포함시켜 생애와 법학세계를 서술하였다. 2013년 9월에는 서울법대 역사관에서 <황산덕의 법학세계>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취현 황산덕(1917-1989)>(관악)이라는 37쪽의 얇은 책자로 생애와 사상을 약술하여 일반인용으로 발간하였다.
이번 탄생100주년을 맞이하여 추모서를 출간한다고 하니 어떤 방향으로 글을 쓸까 한참 생각하게 되었다. 이미 생애와 법사상을 비교적 자세히 쓴 입장에서 반복하여 쓰면 지면만 늘 것이므로, 그야말로 필자만의 이야기로 남기는 편이 나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제 일흔을 넘긴 필자도 역사의 증인으로서 남길 것은 남겨야할 책임을 느낀다. 자유스럽게 스승에 대한 기억과 의미를 적어두고자 한다.
II
필자가 황산덕이란 존함을 들은 것은 1966년에 서울법대에 입학하고 이듬해 형법을 배우면서였다. 유기천(1915-1998)교수의 강의를 듣고 교과서를 읽었지만 황산덕 교수께서 번역하신 목적적 행위론(finale Handlungslehre)의 주창자 한스 벨첼(Hans Welzel) 교수의 저서 <형법체계의 신형상(1957)이라는 번역서를 읽었다. 그리고 <법철학>과 <법철학강의>도 읽으며 이항녕(1915-2008) 박사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 법철학자라는 사실도 배워가고 있었다.
그래도 학부시절과 대학원시절에도 직접 뵐 기회는 없었다. 정비석의 <자유부인>을 두고 논쟁이 있었단 얘기는 당시 낙산문학회에서 활동하던 나에게 가장 흥미를 끄는 사항이었지만 직접 모시고 말씀을 들을 처지는 못 되었다. 1975년 말에 독일로 유학을 가기까지 나는 성균관대 총장, 문교부장관으로서의 존함만 들을 뿐이었다.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유학하고 있던 어느 날 그곳 막스 플랑크 국제형법연구소에 근무하시는 정종욱(1933-82)박사께서 본(Bonn)에 황 문교부장관께서 오셔서 벨첼 교수의 묘소에 참배하신다고 전해주셨다. 나도 본에서 정 박사와 함께 벨첼 교수를 만나 차 한 잔을 나누며 1966년 한국방문 시 강연을 들었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었지만, 유학생 처지에 멀리 가서 인사를 드릴 여유도 없고 묘지참배까지 하시는 대한민국 문교부장관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리기만 했다.
그 후 1979년에 박사학위를 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서울법대에서 시간강사로 <법학개론> 강의를 하는데, 장관직을 끝내신 황 박사께서 대학원에 법철학 강의를 하러 나오셨다. 자연히 정종욱 박사 얘기를 포함하여 독일학계와 법철학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말씀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구수하고 경륜과 동양철학적 깊이가 느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때 나는 김증한(1920-1988) 교수를 회장으로 모시고 한독법률학회의 간사를 맡고 있었는데, 일 년에 한권 <한독법학>지를 발간해야했다. 1982년에 갑자기 프라이부르크의 정종욱박사께서 암으로 돌아가셔서 황 박사님께 추모사를 써달라고 부탁드렸다.
‘정종욱박사 영전에’(<한독법학> 3호, 1982)라는 제목의 옥고에서 이런 얘기를 토로하셨다. 1966년에 벨첼의 일본방문을 이용해 서울로 일주일간 초청했는데 지원을 약속한 신태환 총장도 바뀌고 황 교수도 서울대를 떠난 후라 사비를 털어 모셨다는 것이다. 그 후 이 사실을 안 벨첼 교수가 독일정부에 부탁해 1967년에 3개월간 연구차 방독하게 되었다. 그 때 하나 해프닝은 제자인 정종욱을 사위로 삼으려 했는데, 마틸데(Mathilde)라는 독일처녀가 열렬히 구애하고 심지어 음독소동까지 벌려 대사관에서 결혼주례까지 서주고 오셨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얘기로 시공간의 간격을 메워 황 박사님은 나에게도 사랑을 베푸셔서 댁으로 세배도 갔다. 한번은 <주간조선>에서 사제지간의 대담이란 시리즈에 대담 파트너로 나와 달라고 부탁하셔서 함께 한 일도 있다.
III
나는 법대에서 법사상사를 담당했고 법철학은 심헌섭 교수가 맡았다. 심 교수는 석우의 법철학을 폭넓게 재해석하려 애쓰시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묘하게 법철학과 법사학(法史學)의 중간쯤이라 할 법사상사학(法思想史學)이기 때문에 그렇게 법철학적 이론구성에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게다가 서돈각(1920-2004) 교수에 의해 세계법철학 및 사회철학회(Internationales Verein f. RechtsundSozialphilosophie, ARSP)에 속하게 되어 왠지 황산덕 회장이 장기간 이끄시는 한국법철학회와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연구자도 많지 않은 한국법철학계에 분파작용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1990년대에 김지수 교수(한국외국어대)가 회장으로 계실 때 이 두 회를 통합하자는 의견이 진행되었는데, 그 무렵 황 박사님께서 법사회철학 모임에 참석해주셨다. 나는 그때 역시 대선배께서 물꼬를 터주시는구나 하고 감동하였다. 내가 법사회철학회장직을 맡았을 때 통합을 마무리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