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사설_1 (59회)

세계를 한 바퀴 돌아보고 온 후 약 2개월가량은 별로 하는 일없이 쉬었다. 학교에서 입학시험 사무나 신학기 개강을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4월10일부터 형법총론의 개정판을 쓰기 시작하여 6월 10일에 끝냈다. 또 4월18일에는 건이가 형집행 취소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5월1일부터 나는 동아일보 주필인 이동욱 씨의 주선으로 동아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을 겸하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바라던 자리였다.

6월10일에는 화폐개혁이 단행되어 환이 원으로 바뀌었다. 화교가 많은 돈을 숨겨가지고 있다고 해서 단행한 것이지만 그러나 이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나는 이 무렵에 영어로 번역된 펑우란의 중국 철학사를 읽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때에 나는 소위 동아일보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루게 된다. 그 자세한 경과는 다음과 같다.

사건 요지

1961년 5월 16일의 군사 쿠테타는 민주당 정권이 하도 무능하고 부패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일반 국민으로부터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헌정이 중단되고 국민의 기본권 침해의 상태가 오래 계속되는 동안에 두 달이 멀다하고 국민들은 벌써 군정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물론 언론 통제가 심하였던 관계로 사람들은 대놓고 불평을 하지는 못하였지만 정권에 맛을 들인 군인들이 그대로 주저앉을 생각을 하게 된다면 큰일이라고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다.

실제로 군정에 아부하는 몇몇 대학교수들은 벌써부터 교도민주주의니 무어니 하면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8월15일을 전후하여 정권이양의 시기와 앞으로의 정치형태 등에 관하여 중대한 성명을 발표할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때 나는 동아일보사의 청탁을 받아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하였다. 쿠테타의 정신이 아무리 숭고하다고 할지라도 군인이 오랫동안 정권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환영할 바가 되지 못하며 더구나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군인이 일방적으로 나라의 정치형태를 결정짓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그 글을 쓸 당시의 나의 신념 이었다.

(1) 국민이 원하는 정치형태를 따르라.

1961.8.11 동아일보 기명논단

우리나라의 정치형태로서 앞으로 어떠한 것을 채택할 것인가는 어느 일 개인이 자의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모종의 국민투표 같은 것을 시행하여 정하는 방법도 생각이 되며, 이때에는 국민이라는 이름의 존귀한 권위로 말미암아 명목상으로는 무난할 것이겠지만 그러나 국민 전체가 그 결정된 대로 실천해 나아갈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것 또한 지난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공수표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국가의 참된 정치형태는 국민 전체의 처절한 투쟁을 통하여 유일한 형태로서 쟁취되는 것이며 몇몇 인사가 책상위에서 이리저리로 연습 삼아 그려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보아 온다면 우리나라의 정치형태에 관하여 우리 민족이 절실하게 그 의사를 표시한 때는 작년의 4.19를 전후한 한 번 뿐이었다. 그 이전에도 이런 일은 없었고 그 이 후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독립을 한다는 것은 독립하겠다는 의욕인 희망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독립을 한 다음에 어떻게 하겠다는 포부가 있어야 하고 그 포부를 실천해 나아갈 역량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그러한 이념을 중심으로 민중을 이끌고 나아갈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8.15이후의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조건들이 모두 결여되어 있었다. 이승만 박사가 난데없이 해외에서 돌아와 당시의 국제정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정권을 잡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그에게는 반공. 항일이라는 소극적 정책 외에 어떻게 하면 국내건설을 효과적으로 해낼 것인가에 관한 적극적인 아무런 이념도 없었으며 따라서 그 정권도 자연히 국민으로부터 유리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국민과 호흡을 같이할 수 없는 권력기구의 주위에는 항상 부패가 따라 다니게 마련인 것이며 이리하여 4.19이전에 우리가 본 바와 같은 참상은 필연적으로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박사가 우리나라에서 조작해낸 정치형태인 소위 대통령중심제는 아직 한번도 우리 민족의 참된 인증을 받은 일이 없었던 것이며, 비록 이정권의 오랜 계속으로 말미암아 이득을 보고 있던 일부 층이 아직도 당시에 대하여 미련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들도 이 박사 아닌 다른 사람을 모시는 대통령중심제까지를 좋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이 땅에서의 대통령중심제는 민족적인 거부를 당해본 역사만을 가지고 있을 뿐인 것으로 되고 말았다.

다음에 4.19 이후의 소위 내각 책임제는 우리 민족이 피로서 쟁취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우리 민족이 진정으로 결정한 유일한 정치형태였다고 말할 수가 있다. 당시의 헌정기초자들과 유지들 중에는 이러한 새로운 형태에 의하여 의구심을 가지는 분이 적지 않았으나 일반국민의 여론이 너무도 강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작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을 내린 우리 국민은 결코 현명하였다고는 말 할 수 없었다. 당시의 우리 국민에게는 부패와 독재를 반복시키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의욕은 물론 강했으나 그러나 어떻게 하면 제2공화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 것인가에 관해서는 아무런 이념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8.15이후의 우리가 다시는 일본의 침략을 받아서는 안 되겠다는 강렬한 항일의식은 있었으나 이렇다 할 실질적인 건국이념을 가지지 못하였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리하여 적극적인 이념에 따르는 건설적인 전진이 하나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되자 또 다시 국민은 정권으로부터 이탈되어 갔으며 반면에 정치의 철칙을 따라 집권세력을 중심으로 한 <부패와 구악>은 자유당시대의 그 모습 그대로 반복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민주국가의 정치형태로서 우리가 외국인으로부터 배운 두가지 형을 모두 다 단시일 내에 경험한 것이 되며,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다 실패의 고배였던 것이다. 그러면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성급한 논객들의 입에서 제3의 민주적 형태를 우리 방식으로 창안해 내야겠다는 의견도 나오게 되었던 것이며, 심지어는 수카르노식 교도민주주의를 운운하는 경솔한 발언까지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재언하거니와 한 나라의 정치형태는 결코 몇몇 인사의 주견에서 꾸며지는 것이 아니다. 설사 그것이 권력자의 의사대로 정하여지고 또한 그 권력을 배경으로 일시적으로 강행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국민의 생리와 역량에 맞지않을 경우에는 새로운 부패와 구악의 반복이 있을 뿐 국가의 건설을 위해서는 도리어 해독만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는 제3의 민주적 정치형태를 모색하는 여하한 움직임도 국민들 사이에는 전개되고 있는 것이 없다. 수카르노식 형태라는 것은 그가 항일, 항란 (네델란드)투쟁을 통하여 쌓아올린 이념과 세력을 중심으로 국민의 호응이 뒤따르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며, 타인이 함부로 그것을 모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나라는 <부패와 구악의 일소>를 위한 과감한 수술이 진행 중에 있으며, 그것은 또한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가 있으나 그러나 소극적 숙청과 적극적 건설을 구별해야 하는 이상 이것만으로 제3의 형을 찾는 우리의 실직적인 운동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리하여 우리는 또다시 고전적인 두 가지 민주적 정치형태인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에로 돌아가게 된다. 전자는 우리 국민이 의식적으로 거부한 형이고, 그리고 후자는 우리 국민이 희망하기는 하였으나 부패의 계속과 경험의 부족으로 실패한 형이다. 동시에 이 후자는 아직까지도 형식상으로는 그대로 존속하고 있는 정치형태이다.

이러한 여러 점을 고려할 때에 우리 국민이 원하는 것으로 실증되었을 뿐 아니라 절차상으로도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내각책임제의 정치형태뿐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5.16을 계기로 우리 국민들은 많은 반성을 하였을 것이며 또한 일선에 나선 군인들도 정치란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리하여 모두가 반성. 자숙함으로서 모든 일이 잘 되리라고 낙관되는 것이며 따라서 8.15를 전후하여 있으리라고 전해지는 중대성명에 우리로서는 정권 이양의 시기와 절차에 관한 것 정도로 그쳐지기를 기대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북의 공산정권을 앞에 놓고서 지나친 동요의 장기계속은 금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극도로 언론통제가 되어있던 당시로서는 상당히 과감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글이 발표된 다음날인 8월12일에 박정희 의장은 당초 예상했던 8월15일보다 앞당겨서 정권 이양에 관한 중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소위 8.12성명이라는 것인데 63년 3월 이전에 신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같은 해 5월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그 후에 정권을 이양하되 정부형태는 대통령중심제로 한다는 것이 그 골자로 되어 있었다. 정권이양의 시기를 2년 뒤로 미루었고 정부 형태를 일방적으로 대통령중심제로 못 박은데 대하여 일반국민은 크게 실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