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65회)

이 날은 바로 내가 사설을 써야할 차례였으므로 나는 국민투표에 관하여 다시 한 번 쓰겠다고 제안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동아일보 사설을 통하여 처음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겠다던 박의장의 태도를 변경시켜 개정형식을 취하도록 하였고 또한 대통령중심제와 단원제를 고집하지 않겠다는 차중담화까지 나오게 만들었으니 이제 진일보하여 국민투표까지 단념하도록 만든다면 동아일보 사설은 완전 승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그 자리에서 강조하였다.

이동욱 논설위원은 ʻ황 선생이 지금까지 쓴 사설은 소총사설이 아니라 대포사설이었읍니다.ʼ라고 격려까지 해주었다. 고재욱 주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써보라고 지시할 뿐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다른 분들은 모두 밖으로 나갔으며 나 혼자 3층에 있는 논설위원실로 돌아와 붓을 들었다.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때였다.

동아일보 본관 건물은 서향이며 여름의 오후에는 석양이 직접 들어와 형언할 수 없이 무더운 것이 결점인데 이날따라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아 논설위원실은 마치 찜통과 같았다. 붓을 든 나의 머리에는 이번 사설에서 몇몇 아부하는 교수들을 호되게 공격해야겠다는 삿된 생각이 스쳐갔다. 국사를 논하는 글을 쓸 때에는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한 마음을 가지고 붓을 들어야 한다. 이래야만 글이 술술 풀려나오고 문장도 매끈하게 되어 나온다. 만일 사심을 가지고 붓을 드는 경우에는 아무리 애를 쓸지라도 문장은 제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그러지 않아도 수면부족과 피로와 무더위에 지쳐있는 몸인데 아부교수 후려 갈기겠다 는 삿된 마음까지 겹치게 되니 문장 구성이 잘 될 리가 만무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몇 번이고 썼다가는 찢어버리면서 결국 4시가 되도록 제대로 기필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사설의 원고는 5시까지는 공장에 내려 보내야만 석간 인쇄에 맞출 수가 있는 것이었다. 마음은 다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5시가 되자 고 주필이 전화를 걸어왔다. 성균관대학교의 재단 이사회에 나가야 하니 빨리 사설을 써서 내려 보내라는 독촉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나는 예정했던 분량의 반 정도 밖에는 쓰지 못하였다.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고 그리고 이렇게 초조해 질수록 글은 더욱 더 어지러워만 갔다.

간신히 5시 20분경에 18매의 원고를 다 써내고 다시 읽어 보지도 않고 그대로 사동을 시켜 그 원고를 주필실로 보냈다. 만일 이때에 좀 더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문장을 충분히 다듬어 볼 수가 있었다면 나중에 문제가 된 그 부분은 얼마든지 조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의 나는 시간적 여유가 도무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대로 신문사를 나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그냥 침대에 누어버리고 말았다.

집에서 저녁을 먹고 배달된 석간을 보니 내가 쓴 사설은 본래 원고에는 ʻ하나의 괴물이 있는데ʼ 라고 되어있던 것을 고 주필이 ʻ하나의 사고방식이 있는데ʼ 라고만 고쳤을 뿐 원고 그대로가 실려 있었다. 만일 공산당 선언을 읽은 사람이면 이 괴물이 무엇을 비꼬은 말인지를 곧 연상할 것이지만 고 주필도 아마 그것을 생각해서 자구 수정을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내가 특별한 의도로 집어넣은 괴물이라는 글자가 빠진데 대하여 나는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저녁에 TV를 보고 있는데 9시 뉴스 시간에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보도가 들려왔다. 최고회의의 이후락 공보실장의 말이라고 하여 보도된 바에 의하면 국민투표에 관하여 최고회의에서는 종전부터 확고한 복안이 서 있으며 그것도 모르고 지껄여 대는 동아일보의 논지에 대하여 계속 주목해 왔던 것인데 국가의 위신까지 손상 시키는 언사가 튀어나왔으니 이 이상 더 묵과할 수가 없다는 것이 그 담화의 취지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의 각 기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유엔의 회원국으로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유엔총회에 가도 코리아라는 국가는 회원국으로서는 존재하지 않음을 나는 작년에 뉴욕에 가서 직접보고 매우 서운하게 생각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말하려고 한 것이 나의 글의 뜻이었으며 비록 표현이 좀 서툴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뜻만은 그런대로 나타냈다고 생각되는 글이었다. 따라서 군인들이 이 글을 악의로 해석하여 문제 삼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소 찜찜하고 기분 나쁘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별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서 그 날은 그대로 자 버렸다.

다음날은 일요일이라 대한공론사에서 이후락 씨와 함께 일하던 김봉기 씨를 전화로 연락하여 만나 사설의 취지를 설명해주고 오해 없도록 잘 말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최고회의의 공기가 험악하니 앞으로의 일이 걱정된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또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한태연 씨도 최고회의의 험악한 분위기를 눈치 채고서 나에게 주의를 주려고 하였으나 내가 위의 사설을 쓰기 전에 동경에 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지 못 했다고 한다.

7월 30일이 되어 신문사에 나가 보니 사태는 발칵 뒤집힐 지경이었다. 사설의 취지를 절대적으로 지지한다는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오는가 하면 이후락 씨의 담화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찾아와서 걱정해 주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다소 의아한 마음이 없지도 않았으나 그런대로 일찍 집에 돌아와 쉬고 있었다.

저녁 6시경에 전화가 걸려왔다. 졸업생인데 교수님을 좀 찾아뵙겠다는 것이다.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하고는 그대로 쉬고 있는데 약 10분 후에 문을 두드린 사람은 졸업생이 아니라 바로 중앙정보부의 김 형사였다. 검은색 자가용 지프차에 실려서 끌려 간 곳은 무교동에 있는 중앙정보부 수사국 분실이었다.

▲ 고재욱 주필과 필자가 조사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동아일보 기사 (1962. 8. 2.)

넓은 방으로 안내되었는데 약 한 시간쯤 후에 나타난 사람은 자유당 때부터 치안국 분실에서 일했다는 김병길 씨였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계장님 이라고 불렀다. 아까 나를 연행해 간 함경도 사투리의 인상 좋은 김 형사 외에 또 한 사람의 김 형사가 있었고 그리고 나중에는 전직 검사인 김세배 수사국장까지 나타났다. 김종필 본부장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여하튼 모두 김 씨 판이었다. 인사는 매우 부드러웠고 아침 3시까지 여러 가지 물어 보고는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집에 돌아와 목욕을 하고 그 간의 경과에 관하여 가족들과 의논을 하고 또 동아일보사에 전화로 연락을 하고 있으니까 아침 6시에 김 계장과 김 형사가 다시 차를 타고 와서 나를 데려갔다. 그 두 사람도 잠은 자지 못하고 겨우 집에 가서 옷이나 갈아입고 온 것이었다. 도리어 그들을 동정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나는 사건에 걸려서 잠도 못자고 이 고생을 하고 있지만 당신네들은 이렇게 잠도 못자고 고생하는 것이 직업이 되어있으니 보수는 많이 받느냐고 일면 위로하면서 물어 보았더니 그들은 말씀 마십시오 라며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하였다. 내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그들을 대하고 있으니 그들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이며 심문하는 분위기도 매우 부드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