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중정부장의 직접 심문 (67회)
  제10장 시대와 역사와의 불화

8월 5일 아침이 되어 형무소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하였다. 나의 소재가 알려졌기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의복과 침구 그리고 불경 책이 들어왔다. 또한 동아일보사로부터 5천원이 차입되었다. 역시 밤에 정보부에 불려나가 다음날 아침까지 문초를 받았다. 이번에는 정부를 비방할 목적으로 그 사설을 쓴 것이 아닌가 라는 데에 중점을 두고 질문해왔다.

8월 6일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사설에 있는 여기저기의 귀절을 들어가면서 정부를 비방할 목적이 없었음을 쉽게 증명할 수가 있었다. 글을 쓴 그날에 나는 매우 피곤하였으며 따라서 표현이 부족하여 오해를 살만한 글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정부를 비방할 목적이 없었던 것만은 사실이며 뿐만 아니라 나의 글을 호의로 읽는다면 반드시 당신네들처럼 해석될 것도 아니라는 점을 그들에게 누차 강조하였다.

8월 7일도 마찬가지로 밤에 불려나갔다. 여러 날 잠을 자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육체적 고문은 당하지 않았고 심문하는 말씨도 부드러웠지만 잠을 자지 못하고 연일 신경을 써야하니 그 괴로움이란 형언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정보부의 입장도 매우 딱했던 것 같다. 연 4일간 그들도 같이 밤잠을 설치면서 심문해 보았지만 죄가 될 만한 것을 하나도 잡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초조한 빛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자정을 넘겨 8월 8일이 되었다.

드디어 오전 2시경에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씨가 권총을 찬 채로 나타나서 직접 심문을 시작하였다. 그와 나의 대면은 이것이 처음이었지만 이런데서 그와 만나게 된 것을 나는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였다. 얼마 전에 유진산 씨가 나를 인사동에 있는 음식점으로 불러내어 김종필 씨로 부터 이러이러한 정치적 제안을 받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고 이에 관하여 두 사람이 장시간 논의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그 김 씨를 나는 이런 모습으로 처음 만난 것이다.

나의 심정은 서글펐지만 그러나 나는 침착하였다. 작년 가을 미국에서 박정희 씨와 만나 악수를 하였을 때의 나의 인상은 손아귀가 하도 세기 때문에 농군과 같다는 느낌이었는데 여기에서 김 씨를 처음 만나서 내가 받은 인상은 삼국지에 나오는 성채의 두목과 같았다. 눈은 지혜로웠고 코는 통솔력이 있게 보였으나 재가 승한 반면 덕이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는 나의 개헌의회 구성론에 중점을 두고 물어 보았다. 제2공화국 헌법에 의한 국회를 구성하고 거기에서 개헌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미 해산된 민주당 국회를 다시 불러들이자는 뜻이며 따라서 5.16 혁명을 부인하려는 취지가 아닌가라는 것이 그의 질문의 골자였다. 그는 예리하게 이 점을 추궁하였고 나는 마음속으로 긴장하였다.
 
그러나 나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면서 7월 28일자 사설의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7월 23일자 본란에서 권장한 개헌의 방법은 바로 이러한 결의 밑에서 제안되었던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고 그리고는 7월 23일자 사설에서는 민주당 국회를 다시 소집하자는 주장은 나와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그러나 길가에서 동아일보를 사서 본 독자가 그 사설을 읽고는 7월 23일자 사설을 인용했다고 해서 옛날 것을 집에 가서 찾아보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역시 이 사설은 민주당 국회를 다시 소집하자는 뜻이라고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 김 씨의 반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내가 학술논문을 쓸 때에 늘 이런 식으로 인용해왔고 그런 습관이 남아서 그렇게 썼을 뿐이라고 답변 하였다. 그도 할 수 없이 쓴 웃음을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이 사람 보통이 아니니 너희들 정신 바짝 차리라고 한 마디 하고는 나가 버렸다. 본부장까지 직접 나와 심문하였지만 결국 죄가 될 만한 것은 찾아내지 못 하였다.

8월 8일 밤 9시에 불려나갔으나 아무런 조사도 받지 않고 자정이 넘을 때까지 담배만 피우면서 잡담을 하다가 돌아왔다. 비공식으로 잡담할 때에 나는 헌법심의위원의 구성이 잘못되었으며 헌법학자들만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사견을 털어 논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들이 이 잡담을 역이용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날 밤 고재욱 씨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9일과 10일은 꼼작 없이 형무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자 11일 오후 2시에 정보부의 두 김 형사가 와서 옷을 가지고 나오라는 전갈을 보내 왔다. 옷보따리를 꾸려들고 사무실로 나와 그들을 만나니 반갑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정식으로 검찰에 송치되었으므로 서울교도소(세칭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다고 일러 주었다. 나는 여러날 만에 말동무가 생긴 것이 기뻐서 그들 두 형사 앞에서 그저 지껄이기만 하였다.

역시 검정색 자가용 지프차로 서대문으로 갔는데 차 속에서 함경도 사투리의 김 형사는 나에게 담배를 권해 주었다. 교도소 앞에서 차가 멎었을 때에도 그는 담배 한대를 더 주었고 그리고는 잡범들과 한방에 계시면 선생님의 체면상 좋지 않을 것 같은데 만일 선생님께서 독방을 원하신다면 그렇게 말씀드려 보겠다고 말하였다. 고맙다고 했더니 그는 교도소 안으로 들어가 한참동안 있다가 나와 나에게 들어오라고 하였다.

교도소 안에는 기다란 건물이 여러 채 있었으며 이 건물들은 서쪽에서부터 시작하여 1사, 2사로 불렀다. 각 사마다 2층으로 되어 있고 아래층은 하, 위층은 상이라고 불렀으며 각 층마다 30개에 가까운 방이 있었다. 또한 각 방마다 번호가 붙어 있는데 가령 10호실인 경우에는 이것을 10방이라고 불렀다.

내가 안내된 곳은 2사상 27방 이었다. 이 방에 자유당 때의 한희석 씨가 있었다는 것을 후에 알았다. 이두영, 오선규 두 사람이 2사상을 담당하는 교도보(간수보)였으며 여기에서는 그 사람들을 보통 담당이라고만 부르고 있었다. 일광이 잘 들어오고 방안은 깨끗하고 건조해 있었으며 습기 찬 마포의 감방에 비해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의 나의 감방생활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과거에 우리 민족의 수많은 애국지사가 여기에서 고생하였고 그리고 1987년에 시민 공원으로 만들기로 결정한 유서 깊은 이 형무소에서 앞으로 나는 4개월 가량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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