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정에서 있은 일들_1 (72회)
  제11장 영어(囹圄)의 생활

10월 4일 아침 식사 전에 담당이 와서 오늘 출정이라고 알려 주었다. 식사를 끝내고 변기 청소까지 마친 다음에 밖으로 불려 나갔다. 지금까지 나를 불러내던 안 부장이 아니라 다른 부장이 나를 맞아 주었고 수십 명이 한데 묶여서 군 트럭을 탔다.

오늘 나가는 곳은 중앙군재가 아니라 서울군재라는 것이며 필동에 있는 방위사로 직행하였다. 차에서 내린 우리들은 지하실에 있는 대기실로 끌려 내려가 수갑을 찬 채로 캄캄한 방에 안내 되었다.

얼마 후 담당이 와서 불러내더니 수갑 찬 위로 끈으로 몸을 묶더니 법무사실이라는 표지가 붙은 방으로 끌고 갔다. 방에 들어가자 거기에 앉아 있던 장교들이 일제히 기립을 하였다. 그리고는 차례로 와서 자기의 성명과 법과대학 졸업연도를 신고하였다. 그 방에는 실장인 박용채 중령을 위시하여 법무사인 소령, 대위, 중위가 모두 법과대학 출신이었다. 나는 몸에 묶인 노끈은 풀려 있었으나 수갑은 그대로 찬 채로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으니까 검찰부에서 온 검찰관들이 들어왔다. 내가 수갑을 차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들끼리 무어라고 수근 거렸는데 간간히 들리는 말에 의하면 아직 담당 법무사가 결정되지 않아 간수에게 수갑을 풀라고 지시할 책임자가 없어서 딱하다는 눈치인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 사건이 기소되어 심판부로 넘어오자 법무사들 사이에서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모두가 법대 출신이니 어떻게 제자가 스승을 재판할 것인가 라고 사건을 맡기를 기피하였다는 것이다. 각자가 선생님의 연구실에 있었다느니 또는 선생님의 주례로 결혼하였다는 등 적당한 구실을 붙여서 내 사건을 맞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실장인 박 중령이 잠시 후 간수에게 수갑을 풀어 주라고 한 후 담당 법무사가 아직 결정되지 않아 곤란하였다고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이 곤란한 심정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차피 이 방에 있는 법무사들 중에서 누구 한 사람이 내 사건을 맡아야 하는 것이니 너무 사양하지 말고 빨리 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소. 내 생각으로는 제일 젊은 석진강 대위가 맡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는데” 라고 말을 건네 보았더니 그러지 않아도 석 대위한테 사건을 맡도록 할 작정이었다고 박 중령이 대답하였다.

잠시 밖에 나가 있던 석 대위가 들어와서 그 간의 괴로웠던 심정을 털어 놓으면서 자기가 이 사건을 맡겠다는 결심을 피력하였다.

“자네가 내 사건을 맡겠다니 앞으로 고생이 많을 것이요. 공판기일은 언제쯤으로 정할 생각이요.”
“글쎄 말입니다. 제가 낼 수 있는 시간이 10월 27일쯤 돼야 날 터인데…”
“그렇다면 앞으로 3주일을 형무소 안에 처박혀 있어야 할 텐데, 좀 더 빨리 기일을 잡을 수 없겠나.”
“ʻ가만 좀 계십시요. 다른 사람의 것과 시간을 바꿔 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석 대위는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더니 10월 8일에 시간을 얻었다고 말해 주었다. 수갑을 찬 피고인이 판사실에 가서 담당판사와 공판기일까지 정하고 나온 셈인데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은 아마도 재판사상 처음 있은 일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는 외부 사람들이 보지 않는 속에서 묶여 다녔지만 이제 공판이 열리게 되면 흰 옷을 입고 수갑을 찬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고 또한 그 광경은 신문에도 보도될 것이라 차츰 실감이 나는 것 같았으나 한편 서글픈 생각이 없지도 않았다.

내가 필동으로 끌려나온 것을 안 유무형 변호사는 아내와 영준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 유 변호사도 법대 출신이므로 법무사나 검찰관들과는 동창관계에 있었다. 석 대위의 양해를 얻어 밖에서 도시락을 사다가 먹고는 가족들과 함께 환담을 하다가 다시 수갑을 차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형무소에 돌아와서는 어쩐지 마음이 서글퍼 잠이 오지 않았다.

10월 8일 제 1회 공판이 있는 날 아침의 일과를 끝내고 필동에 있는 방위사로 불려 나왔다. 지하실 대기소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 후 내 수형번호를 부르면서 나오라는 손짓을 하였다. 수갑을 차고 줄로 몸을 묶고 밖으로 나오니 1호 법정 앞마당에는 수많은 학생이 서성거리고 있었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경전차 3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나를 보더니 가까이 달려들며 인사를 하였다. 인솔하는 간수는 그 학생들이 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막아댔다.

간신히 법정 안으로 들어서니 약2백명 가량의 학생들이 이미 방청석에 앉아 있었고 여기저기 헌병이 지켜보면서 서 있었다. 내가 법정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학생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 있는 쪽을 향하여 경례를 하였다. 답례를 하면서 학생들 사이를 빠져나와 피고인석으로 가면서 보니 맨 앞줄에 부모님과 가족 그리고 친척 친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갑을 차고 끈으로 몸이 묶인 채로 나는 선친 앞으로 걸어가 용서해 주시라고 말씀드리며 크게 절을 하였다. 선친은 아무런 말씀도 안하시고 근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시기만 하였다. 3. 1운동 때에 고초를 겪으신 선친께서 43년 후에 자신의 아들이 또 다시 이런 고초를 겪는 것을 보시고 한량없는 착잡한 심정이 되셨던 모양이다. 다음에 나는 가족 친지들에게도 가벼운 목례를 하고 피고인석에 앉았다. 간수가 와서 노승과 수갑을 풀어 주었다.
 
▲ 10월 8일의 공판을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 (1962. 10.8.)

이윽고 김치열, 유무형 그리고 안이준 세 변호인이 들어와 방청석을 향하여 왼쪽 자리에 앉았고 뒤이어 들어온 유원종 검찰관이 오른쪽에 앉았다. 방청석 양쪽에는 각 신문사의 기자들이 앉아 있었고 그 속에 간간이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끼어있음이 눈에 띄었다. 사진부 기자들은 사진 찍기에 바빴고 때때로 나한테 와서 포즈를 취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곧 이어 심판관들이 들어왔다. 재판장은 대령이었고 다른 또 한사람 중령과 그리고 법무사 석진강 대위가 뒤를 따랐다. 그들이 들어오자 법정 안에 있던 사람은 전원이 기립을 하였다. 심판관들이 자리에 앉자 석 대위가 나에게 앉으라고 권하고는 그도 앉았다. 곧 재판장이 개정을 선언하였고 인정심문에 들어갔다. 내가 답변하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자 재판장 옆에 있던 석 대위가 앉아서 답변하라고 권하였다.

인정심문이 끝나자 검찰관 유 대위가 기소장을 낭독하였다. 중앙정보부에서 보내온 것을 그대로 기소장으로 만든 것인데 나의 경력 같은 것을 간단히 소개하고는 나와 같은 헌법 학자를 헌법심의 위원에 위촉하지 않은데 불만을 품고 정부를 비방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기소장 낭독이 끝나자 변호인 측은 준비관계로 공판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재판장은 옆에 있는 석 대위와 상의하고 즉시 변호인 측의 요청으로 오늘 공판은 이것으로 끝내고 다음 공판을 10월 22일 9시에 계속하겠다고 선언하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

심판관과 검찰관이 자리를 뜨자 간수의 안내로 잠시 지하대기소로 갔다가 다시 법무사실로 올라 와보니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검찰관 유 대위가 찾아와서 죄송하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 하였다. 가족이 가져온 점심밥을 먹고 얼마동안 쉬다가 형무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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