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 어머님의 사십구제를 칠보사에서 거행하였다.
1월 21일 영준이 시장개척차 2개월 동안 중동지역 여러 나라 순방.
5월 8일 이선이 공군사관학교에서 금강경 강의.
8월 19일 영부인 육영수여사의 국민장에 성대총장 자격으로 참석
10월 6일 윤상의 첫 등산 (망월사 코스)
나는 매일아침 일찍 일어나 성균관대학 뒷산을 올랐다. 산에 올라 삼청공원 쪽을 바라보면 청와대 뒤 방책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 마치 대낮과 같았다. 이곳을 보면서 처음에 나는 가슴 속에서 끌어 오르는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5개월씩이나 나를 형무소에 가두었던 장본인이 저 안에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박 대통령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가슴에서 우러나는 감정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 감정도 점점 부드러워져 나중에는 청와대를 향하여 기도하는 마음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청와대 쪽을 향하여 합장을 하고 한참동안 염불도 하면서 품고 있던 증오심을 가라 앉혔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된다는 것은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참으로 좋은 일이다.
성균관 대학교 총장이 되자 나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동분서주 하였다. 이 대학을 세계적인 대학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유학연구의 세계적 중심으로 만드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는 유학을 전공한 유승국, 유정동 교수들과 자주 만나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하였다. 그 분들은 거의 흥분하다시피 나의 계획에 협조하였다.
우리들은 그 당시 국학 연구소와 비슷한 기구를 구상하고 있었다. 또한 나는 이 대학을 크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명륜동 캠퍼스는 너무나 협소하여 적어도 이공계 대학만은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마침 이병철 씨의 중앙개발이 수원 부근에 30만평의 땅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중에서 15만 평을 싼값에 교섭하여 여기에 분교를 세우기로 방침을 세웠다. 나중에 이 자리에 굉장한 규모의 수원분교가 들어서게 된다.
비록 짧은 기간이였지만 총장으로서의 나의 활동에는 발동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나를 괴롭힌 것은 이병철 이사장의 대학운영 방침이었다. 재단 상무이사인 홍성유 씨가 모든 권한을 맡아서 하기는 하였지만 그도 역시 이사장의 방침을 그대로 따를 뿐이었다. 홍상무는 나에게 이런 충고를 하였다.
“삼성은 사기업이기 때문에 이익이 안 나는 사업은 하질 않으니 성균관대학을 운영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시고 명예도 좋지만 수익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의 말은 과연 사실이었다. 연초에 작성된 예산이 계획대로 집행되지 않았고 쓰다가 남은 돈은 어디론가 가버리는 것이었다. 재단에서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하여 교수님들의 전화사용 까지도 제한하였고 재단에서 직영하는 대학식당의 음식은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조잡하였다. 참다못한 나는 단단히 결심을 하고 9월 17일 오전 중앙일보사를 찾아 갔다. 이병철 씨를 만나 몇 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만일 그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총장직을 내 놓을 작정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병철 씨는 신입사원 면접일로 자리에 없었고 나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다.
대학 식당에서 맛없는 설렁탕을 가져다 먹고 총장실에 앉아 땀을 닦고 있는데 총리실에서 전화가 왔다는 비서의 연락이 받았다. 의아해하면서 전화를 받자 김종필 총리가 직접 전화로 만나자고 하였다. 중앙청의 총리실로 와 달라는 부탁이다. 전화를 끊고 차를 타고 가면서 무슨 일로 보자는 지 별의 별 생각을 다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이미 차는 중앙청에 도착하였다.
비서의 안내로 2층 총리 비서실에 들어갔지만 나 이외에는 다른 방문객이 보이지 않았다. 곧 이어 실장의 안내로 큰 방으로 들어가니 김 총리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대학의 총장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긴장하였다. 그러자 김 총리가 웃는 얼굴로 다가오면서 악수를 청하였고 우리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았다.
“잘 오셨습니다. 용건을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지난날에 제가 저지른 잘못부터 사과드립니다.” (이것은 필화사건으로 내가 구속되어 있는 동안에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던 그가 직접 나를 심문한 일이 있었던 것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라고 서두를 꺼냈다.
그리고는 사실은 법무를 맡아 달라고 해서 이렇게 자리를 만들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내가 잘 이해를 못하고 다시 묻자 법무부장관을 맡아 달라는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해 보고는 이제 막 성대 총장에 취임했고 그 간에 대충 실정을 파악하여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 보려는 참이라 좀 곤란하다고 말하였다.
김 총리는 황 총장의 개인 사정이 그런 줄은 잘 알겠지만 이것은 국가원수의 의도이니 잘 생각해서 판단을 내리라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김 총리의 제의를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그의 입에서 국가원수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흠칫하였다. 내가 만일 대통령의 요청을 거부한다면 도의상 나는 총장직도 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김 총리 앞에 놓여있는 담배를 가리키면서 담배 한 대를 달라고 말하였다. 지금은 누구나 사서 피울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관광호텔에나 가야 구할 수 있는 고급 담배 SUN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김 총리는 그 담배 한 대를 꺼내서 나에게 권하고 라이터 불을 붙여 주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생각하였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금까지 내가 싫어하던 박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 두 사람의 밑에 들어가 장관이 된다는 것은 좀처럼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의 권력을 쥐고 있는 두 사람의 말을 거역하고는 총장직은 물론 교수직 까지도 위태롭게 될 공산이 크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사사건건 괴롭힘을 받아 본 지난날의 쓰라린 경험을 되풀이 할 수도 없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거절할 것인가 승락할 것인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담배는 다 피고 꽁초를 재떨이에 넣으려는 순간에 삼성 이사진의 시달림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김 총리에 게 말하였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자 “고맙습니다. 그러면 내일 오후 3시에 이 자리에 다시 와 주십시요. 지방에서 올라오시는 분이 있어서(전남대 총장 유기춘 씨를 두고 하는 말), 하루가 늦어진 것인데 새 장관들이 그 때에 다 모이시면 제가 모시고 청와대로 가서 임명장을 받도록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나는 총리실을 나와 그 길로 반도호텔 앞에 있는 삼성빌딩으로 갔다. 신입사원 면접실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이병철, 홍진기, 조우동씨 등이 앉아 있었다. 나는 이 회장에게 잠시 전에 있은 일을 말하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이 회장은 “더 큰 일을 하시게 되었으니 장관으로 취임하셔야지요.”라고 말하였고 옆에 있던 홍진기 군은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악수를 청하였다.
나는 대학으로 다시 돌아와 전화로 집에다가 오늘 일을 알려 주자 이선은 처음에 귀를 의심하더니 나중에는 흔쾌히 반겨주었다. 그리고 학처장들을 모두 모이게 하여 총장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