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연말이 되었고 해를 넘겨 신년이 되자 여러 가지 바쁜 일이 겹쳤다. 그간에도 일요일이 되면 으례 일행들과 가까운 산에 올랐다. 1월26일은 일요일. 이 날도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친구들과 도봉산에 올랐다. 반 쯤 올라갔는데 뒤에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소리가 나더니 무궁화가 헐레벌떡거리며 올라왔다. 청와대에서 곧 들어오라는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나는 일행들을 그대로 올라가게 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는 그 길로 청와대로 갔다. 복도에 서있던 차지철 경호실장이 나를 보더니 왜 이렇게 늦었느냐 각하께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신다고 야단이다.
서재로 들어서니 대통령은 골프복 차림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때문에 골프치러 나가는 것이 약 2시간 가량 늦어진 것이다. 장관들은 언제나 청와대의 동정에 신경을 써야하고 부름이 있을 때에는 즉각 대령해야 하는데 이처럼 여러 시간을 지체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대통령은 내가 늦은 것에 대해 별로 개의하지 않고 “달리 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지난번 법무부 직원들이 수고를 많이 하였기 때문에 돈을 좀 주려고 해서 부른 것이요.” 라고 말하면서 1천만 원을 주셨다. “구체적인 분배는 장관이 알아서 하시요. 그리고 춘부장께서 계시다고 하니 대통령으로서의 성의를 좀 보이고 싶소.”라고 하면서 따로 3백만 원을 주었다.
그 날 저녁에 아버님을 찾아가 문후를 드렸다. 다음날 나는 대통령의 하사금을 법무부와 검찰청 그리고 교도소 직원들에게도 골고루 나누어 주었는데 특히 서울구치소 사람들에게 많이 주었다 그곳 사람들이 많은 고생을 하였기 때문이다.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하였으나 일반 법무행정은 대개 김종경 차관에게 일임하고 나는 주로 정치적인 안건에 관해서만 신경을 썼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청와대 안에서 대통령을 위시하여 몇몇 장관이 비상대책회의를 가졌는데 여기에서 문제된 안건들을 처리하는 것이 나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 그리고는 틈틈이 지방에 있는 검찰청, 교도소, 소년원과 출입국 관리사무소를 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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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무장관 임명장을 받고 있다 (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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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사상계 지를 발행해오던 장준하 씨는 그 잡지의 반정부적 논조 때문에 당국의 탄압으로 경영이 힘들어지게 되자 잡지 출판을 단념하고 직접 정치무대에 뛰어들었다. 이리하여 몇 년 전부터는 대통령이라고 별종이냐라는 말까지 하면서 하루는 병문안을 하러 간 나에게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 신당에서는 윤보선 씨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될 것을 기대하고 있는 모양인데 윤 씨가 반드시 적격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 장 씨는 큰 꿈을 가지고 반 박정희 투쟁의 선두에 나섰다. 그리고 작년에 시국이 시끄러워지자 장 씨 등 30명은 12월 24일에 개헌추진 100만 명 서명운동을 벌였다. 물론 그때 장 씨는 구속되었고 해를 넘겨 재판을 받아 지금까지 1년 동안 옥중에 있었다.
그동안에 나는 입각하여 정반대의 정치노선을 서로 달리게 되었지만 그러나 오랜 친구였던 장 씨가 구속되어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힘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장 씨의 부인으로부터 편지가 날아왔다. 장 씨는 지금 협심증에 걸려 있는데 동절기가 되었으니 걱정이 된다는 취지였다. 나는 의사에게 협심증에 관한 것을 물어보았고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 위험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 당시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는 며칠이 지나갔다. 그리고 12월 3일 나는 청주와 천안을 순시하고 돌아와 저녁 5시 청와대에서 열린 대책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가 끝나자 나는 순간적으로 작심하여 대통령에게 말하였다.
11월 22일부터 2일간 미국 대통령 포드가 다녀갔고 이제 우리나라 대통령은 마음이 좀 느긋한 기분이었기 때문에 그 틈을 타서 건의해 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옥중에 있는 장준하 씨가 협심증에 걸려있다고 하는데 아까 일기예보를 들으니 내일 아침에는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내려간다고 합니다. 의사의 말로는 기온이 급강하하는 경우에는 협심증 환자는 사망할 위험이 많다고 하니 만일 장 씨가 옥중에서 사망한다면 국민의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대책을 시급히 써야 하리라고 생각된다고 하자 대통령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옥중에서 죽도록 해서는 안 되니 오늘밤 안으로 풀어 주시요.”
나는 그 길로 청와대를 나와 법무부로 갔다. 밤이 늦었지만 차관 이하 몇몇 직원은 퇴청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장관실로 불러 작업을 시작하였다.
우선 장준하 씨의 가족을 찾아야 하는데 면목동에 있는 그의 집을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화여대의 김옥길 총장이 생각났다. 장 씨 부인과 김 총장이 얼마 전에 만난 일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화여대의 총장 사택에 전화를 걸도록 하니 김 총장은 부재중이고 시내의 모 교회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급한 일이 생겼으니 잠시 강연을 중단하고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드디어 김 총장이 나왔다.
나는 “김 총장은 빨리 면목동으로 가서 장준하 씨 부인과 함께 안양교도소로 가야겠소. 장 선생을 석방하기로 지금 막 결정 되어서 알려 드리는데 오늘 중으로 장 선생을 모셔 내오지 않으면 석방결정이 취소될지도 모릅니다. 내일 아침 기온이 영하 10도로 내려간 다는 것 때문에 석방하기로 결정한 것인데 그러니 곧 두 분이 안양으로 가서 오늘 중으로 장 선생을 모셔와야 합니다. 알겠읍니까.”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김옥길 총장은 곧 면목동으로 가서 장준하 씨 부인을 차에 태우고 안양으로 갔다. 자동차로 약 1시간 걸리는 거리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장준하 씨는 계엄하의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아 복역 중이므로 그를 석방하기 위해서는 재판에 관여했던 군 검찰관의 서명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 군인은 그 시간에 시내에 나가 술을 마시고 있어서 행방을 알아낼 수 없다는 보고가 왔다.
나는 생각다 못해 서종철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하였다. 서 장관은 사후에 서류보완을 할 터이니 우선 법무부 검사로 하여금 대행토록해도 좋다고 응락하였다. 이리하여 군법회의에 관여하는 검사를 찾아내어 곧 안양으로 가서 형집행정지결정에 대리서명하고 장 씨를 석방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장관실에 앉아 계속해서 진행과정을 보고를 받았다. 밤 11시에 장준하 씨 가족이 장 씨를 넘겨받아 시내에 있는 단골 병원에 입원시켰다는 보고까지 받은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를 위해 좋은 일을 하였다는 생각에 나의 마음은 흐뭇하였다.
병원에 입원한 장 씨는 며칠 동안 잠잠하다가 건강이 회복되자 또 다시 박 대통령을 공격하는 성명을 내기 시작하였다. 나는 대통령의 눈치가 보이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이에 관해 대통령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