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고시 시험위원이 될 무렵 내가 쓴 형법총론이 법문사에서 나오게 되었다. 저자가 국가시험의 시험위원이 아니면 그 책은 팔리지 않는데 시험위원이 되자마자 출판사에서 곧 나의 책을 출간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벨젤교수의 목적적행위론을 근거로 한 형법 교과서로는 한국에서 처음 나온 것이며 따라서 나는 한국의 목적적행위론의 시조가 된 셈이다.
또한 나는 장준하 씨와 약속하여 막스. 웨버를 집필하여 작년(59년) 7월 9일에 탈고한 일이 있었는데 이해 4월 1일에 사상계 총서의 한 권으로 출간되었다. 그 후 장 씨가 정치에 투신하여 사상계사는 망하였고 나의 책도 그냥 절판되었다. 그 후 1976년에 나는 이 책을 막스. 베버라는 이름으로 서문문고의 하나로 출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막스 베버의 사상 전부를 간단히 요약해서 소개한 입문서이다.
허정의 과도정부는 헌법을 개정한 후에 물러갔고 새 헌법에 따른 총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장면 정권은 민주당 안의 신파, 구파 싸움으로 아무런 일도 못하는 약체였고 서울 거리는 매일 계속되는 데모로 지세우고 있었다. 특히 대학생들은 직접 판문점까지 가서 이북 학생들과 만나야겠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처럼 진보적인 학생 집단의 중심에는 나의 막내 동생 황건이도 끼어 있었다. 형은 대학에서 반공강의를 하고 아우는 그 밑에서 반대의 운동을 벌이는 기현상이 당시의 법과대학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한때 나는 고려 대학의 김상협 교수와 함께 총리실에서 장면 씨 참석 하에 전국 대학생에게 호소하는 정담 방송(3인이 하는 대담 방송)을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이러한 혼란에 대하여 속수무책이었다. 한국의 특이한 현실을 모르고 민주주의라는 교과서적 이론에만 사로잡혀 실제에 있어서는 아무런 일도 해내지 못하는 무능정권이었다.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정부의 첫째 책무인데 장면 정권은 그것조차 해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보다 못해 나는 천관우 씨와 홍성유 씨의 권유로 민국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들어가 사설을 통해 민주당 내각의 무능한 처사를 신랄하게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공격해도 반응이 없었다. 이미 그때에 이 정권은 완전히 통치능력이 마비되어 있었으며 신문에서 아무런 말을 해도 그것을 소화시킬 능력이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이 싱거워졌으므로 몇 달 후에 (61년 4월 3일자로) 이 신문사를 그만 두었다.
부산에서 환도한 후 처음에 나는 을지로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으나 1958년 말에 필동에 있는 집을 전세로 얻어 이사를 갔다. 사상계사 주최로 전라도 순회강연을 한 것은 이 집에 있을 때였고 나의 학위논문을 빌려 달라고 최일운 교수가 찾아온 것도 이 집이었다. 1년 후에 나는 명륜동 3가에 있는 집을 전세로 얻어 다시 이사하였다.
이 집에 있을 때에 우리는 4.19를 맞았다. 그 때에 영준이가 친구와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다가 돈암동 3거리에서 리아커와 충돌하여 머리에 부상을 입고 수술을 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아내가 이리저리 융통하고 또 내가 한국은행에 가서 융자를 얻어 바로 뒤에 있는 집을 600만환에 사기로 하였다. 이것이 바로 명륜동 3가 61의18에 있는 집이다. 이 집은 아직도 나의 명의로 되어있는 나의 유일한 자산이다.
겨울방학이 되자 나는 새로 이사 간 집 2층에서 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추운 방에서 매일 글을 썼기 때문에 손끝이 마비되어 1961년 봄부터는 오른팔에 통증이 왔다. 그래서 교단에서 강의할 때에도 흑판에 왼손으로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때에 쓴 원고는 현대 법철학입문이라는 이름으로 박영사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의 병은 약 2개월 뒤에는 물러갔다. 다만 약을 먹다가 통증이 없어졌으므로 약의 복용을 그만 두었는데 오른손 둘째 손가락의 마비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약을 끊었으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둘째 손가락 끝의 마비 기운은 그대로 남아있다. 이것은 나의 큰 실수였다.
1961년(45세). 혼미한 정국 속에서 나는 독서와 집필에만 전력하였다. 특히 추운 겨울 날씨 속에서 나는 현대 법철학입문을 써냈다. 이리하여 오른팔 병을 얻기도 하였다. 자유당 정권 밑에서 기세를 떨치던 유기천 교수는 민주당 정권 밑에서도 여전히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이리하여 나는 민주당 정권에 대해서도 실망하였고 그럴수록 나는 더욱 더 공부에만 전력하였다. 법철학 연구의 범위를 현대의 것에까지 확장하는 것과 목적적행위론에 의한 형법체계를 완성시키는 것이 당시 나의 관심사였다.
2월25일에 영준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이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또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을 졸업한 아내 이선은 동국대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우리 집안에 경사가 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