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국으로 가게된 것은 미 국무성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1등석 왕복 비행기표가 주어졌고 매일 20불씩 일당이 주어졌으며 미국 안에서는 안내인이 붙기로 되어 있었다. 10월 26일에 김포를 떠난 나는 곧 동경에 도착하여 승선관 군의 안내로 2일간 묵었다. 과거에 내가 여러 번 갔던 일이 있는 동경의 옛 모습을 재확인하는 정도였으나 폐허 위에서 재건하려는 일본인의 모습이 역력하였다.
10월 28일 밤에 금방 지나가는 태풍의 뒤를 쫓아가면서 팬암 제트기로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이 때에 나는 제트기의 위력을 실감하였다. 밑에서는 태풍이 지나가고 있으나 3만피트 상공을 날으는 비행기 안은 조용하기만 하였다. 미 국무성 직원이 호놀룰루공항에 마중 나와 안내하여 열대풍으로 지은 호텔에 나를 투숙시켰다. 공항에서 입국절차를 밟을 때에 나는 가지고 간 X레이 사진을 제출해야 했는데 이것은 한국 사람에 한해서 결핵심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 교포의 안내를 받아 와이키키 해수욕장도 가 보았고 또 오하우섬의 여기저기를 구경하였다.
또한 나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개발한 테트론 섬유로 만든 와이셔츠를 10불에 사서 입었다. 물로 빨아서 그대로 말려 입으면 되는 것이어서 여행하면서 입기에는 참으로 편리한 것이었다. 이때가 미국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풍요롭게 느껴지기만 하였다. 미국 시간으로 10월 29일 하와이를 떠나 밤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역시 교포의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는 다음날 밤에 UAL기를 타고 11월 1일 아침에 볼티모어 공항에 내리자 미 국무성 직원과 안내인 신인섭 군이 마중 나왔다.
신 군은 서울대 상과대학을 나와 American University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그는 앞으로 3개월 동안 나를 안내할 예정이다. 지금은 시민권을 얻어 그곳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내가 나중에 문교부 장관으로 있을 때에 한국을 다녀간 일이 있다. 국무성 차를 타고 Washington D.C.로 들어와 국무성에서 지정한 호텔에 투숙하였다(호텔 숙박비는 언제나 8불이하).
워싱턴에 있는 동안 나는 신군의 안내로 백악관, 국회 그 밖의 몇몇 명소를 구경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이 때에 우리 대사관도 방문하였다. 정일권 장군이 대사로 있었고 외무부 차관으로 있다가 지금은 제네바 대사로 간 이상옥 군과 그리고 지금 외무부 차관으로 있는 오재희 군도 이때에 여기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11월 4일에 나는 뉴욕으로 가서 시장선거 광경을 지켜보았고 또 ABC TV방송국을 참관하였다.
그리고는 11월 8일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11월 13일에는 박정희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에 왔다. 두 사람은 동갑나기였는데 미국정부의 접대가 소홀하다고 해서 시카고에 그대로 머물러 있던 박의장을 케네디 대통령이 부통령 죤슨을 그곳까지 보내서 워싱턴으로 모셔오게 하였다.
곧 이어 프레스 클럽에서 각국 신문기자들과의 회견이 있었는데 이 회견장에 나도 초대되어 가보았다. 1시간동안 비프스테이크로 점심을 먹고 1시간 동안 질문을 받는 순서로 되어 있었는데 박 의장은 천천히 한국 말로 성명문을 읽고 그것을 다른 군장교가 역시 천천히 영어로 번역하여 말하는 바람에 45분이 걸렸다. 결국 질문 시간은 15분밖에는 남지 않았다. 컬럼비아의 기자가 질문하였다.
"ʻ귀하가 집권하자 음식점에서 쓰던 나무 젓가락을 모두 없앴다고 하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이요."
이것은 우리나라의 조림사업과 깊은 관계가 있는 문제인데 이에 대한 박의장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이 우리나라의 나무 사정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가져주니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11월 16일에는 주미대사 정일권 씨의 주최로 그 곳 대사관에서 박 의장과 교포가 만나는 파티가 있었다. 나도 초대되었고, 입구에서 나는 박정희 씨와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법과 대학의 황산덕 교수입니다" 라고 말하자 그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언제 미국에 오셨습니까. 나는 황 교수가 못 오실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약 2주일이 된다”라고 대답하는 나의 머리에는 박계주사건이 스쳐 지나갔다.
11월 19일에 나는 신군과 함께 기차로 캠브리지에 갔다. 이곳에 있는 하바드대학에서 그곳 교수들도 만나고 또 여기저기를 시찰하기 위해서였다. Samner Rd. 20번지의 2층에 1개월 계약으로 방을 하나 얻어 들었다. 여기에서 나는 유명한 풀러(Fuller)교수도 만났고 또 나의 이름으로 그의 책을 번역 출판한 바 있는 프리드리히(Friedrich)교수도 방문하였다. 또한 연경도서관 한국 분야 담당 교수인 와그너(Edward Wagner)와 그 밑에서 일하고 있는 김성하 씨도 만났고 서울대학교의 한우근 교수와 이화대학교의 박준규 교수가 그 곳에 와 있었으므로 그들과는 자주 어울렸다.
하루는 서울에서 학생들이 왔다. 5.16혁명의 불가피성을 알리기 위하여 군사정부에서 파견한 학생들이었다. 연경도서관의 강당을 장소로 정하고 강연회를 시작하였는데 청중은 300명가량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화여자 대학교의 영문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 단상에 올라가 유창한 영어로 강연을 하였다. 옆에 앉아서 사회를 보던 와그너 교수가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말하였다. 한 기자가 물었다.
"당신들은 서울의 Korean Republic지에서 보내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신문은 정부기관지가 아닌가." 라고 하자 그 여학생은 한참 생각하더니 반관반민이라는 뜻에서 half and half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청중은 큰 소리로 웃어댔고 그리고 그 여학생은 이유를 몰라 아주 당황해하는 모습이었다. Half and half라는 말은 속어로서 별로 점잖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 경우에는 다르게 표현해야 하는데 순진한 외국 여학생이 그 말의 깊은 뜻을 모르고 실수를 한 것이다. 나는 미국 청중의 무정함에 아주 기분이 나빴다.
캠브리지에 있는 동안에 나는 김성하 씨의 안내로 보스턴시내를 구경하였고 당시의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궁궐 같은 사저도 가보았다. 또 남쪽으로 내려가 최초의 미국 이민선 메이플라워호가 도착하였다는 Plymouth‐Rock도 돌아보았다. 그리고 12월 3일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다.
12월의 뉴욕의 기후는 좋지 않았으므로 나는 항상 건강에 조심하였다. 12월 5일에는 뉴 헤이븐을 방문하여 그곳의 예일대학을 구경하였다. 그곳은 바로 당시에 한참 유행하던 Behaviorism(행동주의)의 본고장으로서 만나는 교수마다 내가 프리드리히 교수의 책을 번역한 것을 빗대어 무엇 때문에 쓰레기통에나 들어갈 책을 번역 하였는가 라고 빈정거렸다. 이 교수들은 바로 유기천 씨를 지도한 사람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