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8일에는 프린스턴을 방문하여 그 곳 대학의 글렌 페이지(Glenn Paige)교수의 안내로 대학의 여기저기를 구경하였고, 또 아인슈타인이 죽기 전까지 살았던 집도 가보았다. 페이지 교수의 집에서 저녁 초대도 받았는데 그의 집에는 서울에서 가지고 간 그림과 골동품이 꽤나 많이 있었다.
그는 지금은 호놀룰루에서 살고 있는데 그 때에 함께 살던 부인과는 헤어지고 지금은 다른 부인과 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나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내가 박 정권 밑에서 장관이 된 이후부터는 나를 비난하며 다닌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지금 호놀룰루에 있는 대원사의 후원인으로 있으면서 한국 불교의 국제적 발전을 위해 열심히 뛰어 다닌다고 한다.
뉴욕의 날씨는 계속 음산하여 견딜 수 없었으므로 일주일 정도 남쪽에 가서 휴양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국무부에 요청하여 비행기 표를 구해 12월10일~16일까지 카리브해에 있는 미국 식민지 푸에르토리코의 수도 산 후안에 가서 해수욕을 하였다.
그런데 이곳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으므로 그 곳에 있는 미국 해군의 PX에 가서 10불 정도를 주고 식료품을 사다가 호텔에서 자취하면서 해수욕을 다녔다. 미국의 식민지라고 하지만 시내에서는 도무지 영어가 통하지 않았다. 라디오도 스페인어 방송만 나왔다. 자치주 정부 당국자의 안내로 어떤 가정을 방문하였는데 부모가 모두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서 백인, 흑인 그리고 인디안 색의 자식들이 태어난 점으로 보아 이곳 사람들의 혼혈 정도가 매우 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는 해수욕을 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케네디 대통령부부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였다. 해수욕장에 있는 해변가 호텔에서는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 여사의 딸들로 구성된 김 씨스터즈의 쇼가 매일 저녁 있었는데 나는 돈을 풍부하게 쓸 처지가 못 되어 그곳에는 가보지 못했다.
12월 16일 다시 뉴욕으로 돌아 갈 때에는 인도네시아인이라고 농담할 정도로 얼굴이 까맣게 타 있었다. 연말까지 이곳에 있었는데 날씨가 좋지 않아 매우 고통스러웠다. 호텔 바로 옆에 고려대학교 출신의 신이라는 청년이 경영하는 한국음식점이 있었는데 저녁에는 으례 갈비탕을 먹으러 그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서울대 상과대학의 고승제교수를 자주 만났다.
1962년(46세) 1월1일 송년 자정을 나는 타임스퀘어에서 맞았다. 빌딩의 시계가 0시를 가리키자 수많은 남녀가 서로 짝을 지어 소리를 지르며 열광했는데 이것은 정초에 매년 볼 수 있는 이곳의 명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초의 뉴욕 거리는 한산하였기 때문에 나 같은 외국 손님은 영화 구경밖에 할 수 없었다. 전쟁영웅을 찬양하는 소련영화 한편을 보았다.
1월 2일 아침에 나는 호텔을 나섰다. 뉴욕을 떠나기 전에 비가 많이 왔지만 그런대로 비행기는 이륙하였다. 얼마 후 우리는 시카고에 도착하여 호수가에 있는 힐튼호텔에 숙박하였다. 전화번호로 정보라 씨를 찾아내어 함께 술을 마시고 환담했다. 그는 치과의사로 내가 보건후생부에서 근무할 때에 알게 된 사람이었다. 중국계 여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다음 날 이곳의 노스웨스턴대학을 방문하였고 유명한 Merchandise Mart를 구경하였다. 이 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품전시관인데 케네디 부친이 깊이 관여하고 있는 곳이라고 들었다. 미국이 세계경제의 중심이라는 것을 절감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 계속해서 날씨는 좋지 않았기에 시카고에 대한 나의 인상은 별로 좋은 것이 못 되었다.
1월 4일 밤에 시카고 오헤어 공항을 떠나 덴버로 갔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는데 공항을 떠나 30분가량 지났을 무렵 기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곧 하늘에서 곤두박질하여 떨어지다가 또 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것을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거의 30분가량 비행기속을 뒤집어 놓았다. 광풍이 불어대는 하늘 위에서 나무 잎 하나가 날아가듯이 내가 탄 비행기는 방향 감각을 잃고서 제멋대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었다. 기내에 탄 사람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다. 모두가 죽은 듯이 고요하였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 대부분은 기도를 올리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합장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하였다. 나는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얼마 후에 비행기는 안정을 찾았고 드디어 기내방송이 들려왔다. 일기예보에도 없는 돌풍이 캐나다 쪽에서 밀어 닥쳐 한때 위기에 빠졌으나 이제 그 난기류를 벗어났으니 안심하라는 것이다. 난생 처음 당해보는 비행기속 하늘 위에서의 아찔한 위험에 혼쭐이 났었다.
1월 5일 오전 3시 경에 덴버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얼마 전에 몇 건의 은행 강도사건이 있었는데 범죄 수사를 하러 들어간 경찰이 금고에 남아있던 범인의 지문을 지워버려 범인 체포를 힘들게 한 것으로 매스컴에 보도되어 크게 유명해진 도시였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의 운전사가 경찰 책임자가 어제 바뀌었으니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도 하였다.
호텔에 들어갔으나 곧 출발해야 했으므로 잠은 자지 못하고 잠시 휴식만 취하였다. 날이 밝자 역으로 나가 California Zephyr라는 이름의 초특급 호화열차를 탔다. 1인용 특등실에 들었는데 우선 잠을 좀 자고나서 2층의 투명한 돔에 올라가 앉아 다과를 먹으면서 사방의 경치를 바라보며 기차여행을 즐겼다. 콜로라도 계곡을 구비구비 돌아 유타주와 네바다주를 지나 캘리포니아주의 넓은 목장과 농장 그리고 골프장 등을 보면서 1월 7일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오랜 기차 여행이었지만 미국의 서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무척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이번에는 송광률 목사의 안내를 받았다. 하루는 송 목사의 차를 타고 그의 아들이 다니는 칼리지로 갔다. 대학본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본부 앞의 넓은 잔디밭에서는 수백 쌍의 남녀가 서로 짝을 지어 부둥켜 안고 딍굴고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 나는 형언할 수 없이 놀랐다. 그리고는 한국 학생이 이곳에 와서 이런 짓이나 하고 있으면 참으로 큰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날은 미국 부인의 안내로 시내를 구경하였다. 금문교를 돌아 해변으로 나가니 수영복을 입고 수영하는 사람, 셔츠만 입은 사람, 양복을 다 갖추어 입은 사람, 외투까지 껴입은 사람 등이 섞여 있어 참으로 다채로웠다. 계절은 1월이었지만 이곳 사람들이 모두 자기 개성에 따라 마음대로 옷을 입고 남의 눈치 같은 것은 보지 않는다는 것을 실제로 눈으로 볼 수가 있었다.
1월 9일에는 남쪽으로 한 시간 가량 내려가 팔로알토에 있는 스탠퍼드 대학을 방문하였다. Hoover Institute를 돌아보고 법학 교수들과 점심을 같이 하고 왔다. 그 후 20년이 지나서 이 대학에는 사위 덕주가 옥채와 손주 우진과 함께 기숙사에서 살면서 박사 학위를 받은 곳이다. 덕주는 그 후 NASA에 취직하여 손녀 상임이도 함께 낳아 지금은 그 인근의 산호세에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