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0일에는 버스를 타고 북으로 버클리에 가서 켈리포니아 대학을 방문하였다. 여기에서 나는 미국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Cyclotron(원자핵 파괴장치)을 안내 받았고 또 제롬 코헨교수가 대접하는 점심을 먹고 내가 존경하는 한스 켈젠(Hans Kelsen)선생을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80이 넘으신 분이고 대학에서 은퇴하여 이 작은 집에서 부인과 둘이서 살고 있었다. 본래는 빈대학 교수로 있다가 히틀러의 유태인 배척으로 난을 피해 여기에 있었던 것인데 아직도 영어 보다는 오스트리아 사투리의 독일어를 쓰고 있었다.
미국에 대한 그의 감정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무종교 유태인으로서 유태교를 믿는 유태인과 기독교인을 전부 한데 몰아서 비난하셨다. 아이젠하우어가 유태인을 보호했다고 하지만 자기와 같이 유대교를 믿지 않는 유태인은 조금도 보호하지 않았다고 몇 번이고 되풀이 하였다.
그 분의 서재에는 다른 사람이 쓴 책은 하나도 없고 자신이 집필한 저서와 논문 그리고 그 번역본만이 있었는데 책장 속에는 내가 번역해서 보내드린 <순수법학>과 <법과 국가의 일반이론>이 꽂혀 있었다. 그 후 켈젠 선생은 부인이 돌아가신 후에 쓸쓸히 양로원에 가 있다가 1973년에 93세로 돌아 가셨다. 1920년대에 이르러 10여 년 동안의 세계 법학계는 가히 켈젠시대였다고 말 할 정도로 그 분이 남기신 업적과 파문은 대단하였다. 다만 독일 학자들만은 그 분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다소 경원하는 눈치를 보일 뿐이었다.
1월 11일 나는 기차로 로스앤젤레스에 갔다. 도심 지대의 낡은 호텔에 들었는데 이 호텔은 과거에 이승만 박사가 활동 무대로 사용하던 곳이라 한다. 지금은 이 도시에 우리 교포가 30만 이상이나 살고 있어서 코리아 타운이 형성되어 있지만 내가 이곳을 처음 방문하였을 때에는 중국인이 모여 사는 China Town과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는 Little Tokyo가 있을 뿐이었다. 도시는 지극히 넓었지만 분지로 되어 있어 매연이 빠지지 않아 공기는 나쁜 편이었다. 그래서 smoke와 foggy를 합쳐서 smoggy라는 새로운 용어가 이곳에서 생겨날 정도였다.
L. A.는 과거에 이승만파와 반대파 사이에 치열한 당파 싸움이 벌어졌던 곳이며 아직도 그러한 분위기가 이 도시에서 가시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날은 푹 쉬었고 1월12일에는 헐리우드를 구경하였다.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가서 영화 찍는 광경을 보았고 또 중국인 극장 앞에 유명한 배우들이 남긴 손자국 발자국 사인도 보았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유명한 배우들의 호화스러운 저택은 참으로 볼만 하였다.
1월 14일 아리조나주의 피닉스로 가서 공항 바로 옆에 있는 호텔에서 하루 밤을 잤다. 15일 아침 일찍 일어나 쌍발 프로펠러기로 그랜드캐니언 입구에 있는 작은 도시 플래그스태프로 갔다. 이 비행기에는 농사 지러 가는 농부 몇 명이 타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관광버스로 갈아타고 그랜드캐니언로 갔다. 버스는 광활한 평야를 지나가 수백만 년 동안 지층이 내려앉으면서 생긴 거대한 계곡을 끝도 없이 펼쳐 보이는, 참으로 위대한 자연의 경관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고 또 거기에서 인디언의 살림집도 구경하였다.
다시 피닉스로 돌아와 호텔에서 하루를 지나고 다음날 16일에는 텍사스주의 달라스로 갔다. 흑인에 대한 차별 대우가 심한 곳인데 얼마 전에 인도수상 네루가 이곳에 와서 공항 다방에서 커피를 주문하다가 축출된 일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Black과 Brown은 차별하지만 나와 같은 황색인은 백인취급을 해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씁쓸하였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공항 다방에서 커피 한잔을 사 마셨다.
다음날 나는 먼저 Southern Methodist대학을 방문하였다. 여기는 이전에 서돈각, 김도창씨가 와서 공부한 일이 있는 곳인데 특히 미국의 판례를 입력한 컴퓨터가 눈에 띄었다. 오늘날의 컴퓨터는 소형화 되어 있으나 그때만 해도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 그 컴퓨터의 크기는 집채만 하였다.
다음에는 도심에 있는 합동법률사무소를 가 보았는데 여기에서는 한국에도 여러 번 온 일이 있는 유명한 법학자 딘 스토리(Dean Storey)도 만났다. 또 법원을 방문하여 음주 운전한 기사를 재판하는 광경을 참관하였다. 그리고 그 곳 유지인 미국인의 안내로 목장을 구경하였으며 진짜 카우보이들도 만나 보았다.
가정방문을 두 차례나 하여 저녁을 같이 하였는데 대체로 댈러스 사람들은 외국인에 대하여 친절하였다. 한 집에서는 여 판사인 주부가 남편과 함께 자는 침실까지 보여 주었고 다른 한 집에서는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등이 있는 것을 보고 서울에 있는 내 아내가 불쌍하다고 말했더니 그 집 부인이 하는 말이 나는 이런 것 다 없어도 좋으니 당신 부인과 같이 식모 두 사람을 두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텍사스 사람들의 독립심은 대단하여 가령 뉴욕에 다녀와서도 미국에 갔다 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1월 21일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내가 받은 비행기 표는 서울로 직행하는 1등권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유럽으로 돌아가는 2등권으로 바꾸기로 하고 부족액 30불 정도를 내가 지불하였다. 그리고 미국을 떠날 준비를 하고 국무성을 찾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1월 25일에 뉴욕으로 가서 1박을 하고 고승제 교수 등의 환송을 받으면서 26일 밤 팬암기로 영국으로 갔다. 떠나기에 앞서 자동차로 흑인만 사는 Harlem가를 둘러보았는데 분위기가 험악하였다. 앞으로의 여행은 안내자 없이 혼자 가야 하는데 비용은 미국에서 쓰다 남은 돈으로 충당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미지의 세계를 혼자 가는 것이지만 마음은 지극히 가벼웠다.
밤새도록 대서양을 횡단한 비행기는 1월 26일 아침에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였고 주영대사관의 참사관으로 있는 송광모 군이 마중 나와 자기 차로 호텔에 데려다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