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나는 혼자 구경을 다녔다. 먼저 택시를 잡아타고 대영박물관으로 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이라 나는 그저 경탄하는 마음으로 둘러보았다. 1층에서 어떤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수위가 제지하면서 옆에 세워놓은 게시판을 보라고 한다. 이 방은 마르크스가 공부하던 방으로 허가증이 없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고 씌어 있었다. 로제타 석을 본 것이 인상 깊었고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본 소크라테스 상도 있었는데 사람들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구석진 곳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박물관을 나와 문방구점에서 런던시내 관광안내도를 사서 들고 보면서 의사당 건너편까지 걸어서 갔다. 테임즈강 건너에 있는 의사당을 찍으려고 이리저리 위치를 찾고 있는데 어떤 신사가 한 지점을 가리켜주어 그 지점에 가서 카메라를 대고 보니 과연 의사당 건물이 완전하게 잡힐 수 있었다. 계속 걸어서 런던 타워로 갔다. 영국 왕실이 가지고 있는 다이아몬드는 마침 비공개일이라 보지 못하였고 진열장에는 주로 무기, 고문도구, 투구 등이 진열되어 있어 영국 역사의 피비린내 나는 한 대목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 정원에서는 헨리 8세의 왕비 앤 보래인의 목을 자른 나무토막이 세워져 있었는데 도끼의 자국이 또렷하게 보였다.
다음날도 걸어 다니면서 시내 구경을 하였다. 버킹감궁전, 트라팔가광장, 수상관저(10 Downing)등을 돌아보고 Charing Cross가에 있는 Foyles라는 책방에 들러 Joseph Needham의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vol l, ll, lll,을 사서 서울로 붙이고 왔다. 번화가인 피카딜리 가도 가보고 지하철을 타고 담배를 피우다가 제지를 당하기도 하였다. 물자가 풍부한 미국에 있다가 절약을 강조하는 영국에 오니 모든 것이 불편하였다.
송 군의 안내로 중국음식점에 갔더니 같은 동양 사람이라 그런지 매우 친절 하였다. 음식을 다 먹고 나오는데 아까부터 옆에 앉아서 기다리던 아시아계 손님이 소리를 질렀다. 나중에 온 저 사람들은 다 먹고 나가는데 우리는 왜 주문도 받지 않느냐고 하자 집 주인인 중국 사람은 그들을 보고 나가라고 소리 지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들은 파키스탄 사람인데 영연방 국가라 비자 없이 입국시켰더니 천연두를 가지고 와서 한때 전 영국에 소동이 일어난 일이 있었고 따라서 파키스탄 손님은 일체 받지 않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나의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았으나 영국에서는 영어 회화가 그런대로 통하였으므로 혼자 걸어 다니면서도 별로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1월 29일에는 파리로 갔다. 그 곳 백선엽 대사에게는 미리 연락해 두었지만 공항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백 대사는 신임장 제정 관계로 네델란드에 가있었으므로 파리에는 없었다. 공항의 은행에서 환전을 하고 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에어 프랑스의 터미널로 갔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택시를 타고 Mozart가 33번지에 있는 한국 대사관으로 찾아 갔다. 그곳에도 점심때라 아무도 없었고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된 직원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그에게 부탁하여 부근에 있는 자그마한 여관에 들었다.
그리고 혼자서 식당을 찾아가 점심을 먹고는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를 거쳐 꽁꼬르드 광장을 지나 루브르 박물관까지 시내 구경을 하였다. 그런데 영국에서 걸린 감기 때문에 치통이 심하여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모나리자가 있는 곳에 도달하는데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가 없어 박물관을 나왔다. 호텔로 돌아오는 도중 약방을 찾아가 서투른 프랑스어로 억지 의사소통이 되어 여자 약사는 진통제 한통을 주었다. 그 약을 먹고 나서 나는 잠을 좀 잘 수가 있었다.
다음날에는 걸어서 에펠탑까지 올라가 보고는 세느강을 거슬러 소르본느 대학이 있는 라텐구도 보았다. 그리고 노틀담과 몽파르나스로 가서 무궁화를 위하여 화구도 샀다. 저녁에는 개선문 옆에 있는 샹젤리제 거리의 호화스러운 백화점에 가서 코티분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곳 여점원은 코티분을 몰랐다. 몇몇 여점원과 논의했으나 누구도 몰라 안으로 들어가 약간 나이 많은 여인에게 물어보고 오더니 그 여점원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코티분은 전에는 있었으나 지금 파리에서는 그런 것을 팔지 않고 Elizabeth Arden을 팔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한참 동안을 여점원과 색깔과 품질종류 등을 놓고 어느 것을 고를지를 씨름하다가 겨우 진땀나는 거래가 성립되어 간신히 집사람을 위한 선물을 마련할 수 있었다.
2월 1일(1962) 신임장을 봉정하기 위해 네델란드에 다녀온 백선엽 대사가 나를 찾아와 파리 구경을 시켜주었다. 특히 베르사이유 궁에 가서는 유물 하나 하나에 대해 참으로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알고 있는가 라고 물었더니 얼마 전에 최덕신 외무장관이 다녀갔는데 그때 안내를 하기 위해 공부를 좀 했노라고 대답하였다.
2월 2일 나는 에어프랑스로 파리를 떠나 듀셀도르프로 갔다. 날이 흐려 구름이 많이 끼어 있었는데 그 속을 프랑스 비행기는 곡예 비행하듯 재롱을 부리면서 날아가 승객의 가슴을 조이게 하였다. 공항에는 나의 친구인 신응균 대사가 직접 마중 나왔다. 언제나 고 자세인 신 대사가 서울대 교수에 불과한 나를 위해 공항까지 마중나간 것을 보고 그 곳 교포 학생들이 의아해 하면서 모두들 내 얼굴을 보기 위해 대사관으로 모여 들었다. 그런데 그 학생들 중에는 본대학에 다니다가 나중에 맏사위가 된 김웅도 끼어 있었는데 그들과 함께 대학 교정에 나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몇 년 전에 벨젤 교수에게 소개한 정종욱 군도 나를 찾아와 함께 하였다. 다음날 나는 정군의 안내로 본대학 안에 있는 벨젤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하였다. 그 분과 나의 역사적인 첫 대면이 여기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날 오후에 나는 베누스베르그에 있는 그 분의 자택을 방문하여 서울에서 가지고 간 자수정을 부인에게 선물로 주었다.
비엔나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왔다. 그리고는 정군의 안내로 본시내를 돌아보았고 4일에는 쾔른으로 가서 유명한 돔에도 올라가 보았다. 다음날 나는 정군과 함께 기차로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그리고는 유명한 괴테하우스를 구경하고 나와 소시지와 맥주로 점심을 하고 그 길로 하이델베르그에 가서 그 유명한 성을 구경하였고 그리고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에 나오는 술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독일 여행은 이정도로 간단히 끝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