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매
15세 때의 여름방학을 앞두고 나는 김봉관, 김원찬 등과 함께 시골에 가서 캠핑생활을 하기로 약속한 일이 있었다. 약속한 날이 되었지만 곧 장마가 시작되어 비가 그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번 약속하면 반드시 지킨다라는 나의 신조 때문에 그 날이 되자 캠핑 떠날 준비를 하였다.
밖에서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지만 준비를 끝낸 나는 어머니에게 출발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어머님은 절대로 보낼 수 없다고 반대하셨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어떻게 야외에서 천막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백번 옳은 말씀이었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떠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친구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이유였다. 그러나 어머님의 고집도 대단하시었다. 내 친구들의 어머니도 이렇게 비가 쏟아지면 못 가게 하실 것이다 라며 극구 말리는 바람에 결국 떠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 날 나는 사업관계로 서울에 가 계시던 선친에게 편지를 썼다. 이렇게 자유가 억압되기만 하니 죽고 싶다는 취지였다. 서울에서 나의 편지를 받아 읽으신 선친께서 그 길로 내려오셨다. 노하심이 이만 저만이 아니셨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선친에게서 크게 꾸중을 들었고 또 매까지 맞았다.
내가 선친에게서 사랑의 매를 맞은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부모 앞에서 자식이 죽고 싶다고 말한 것은 매를 맞아 마땅한 일이었다. 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 나는 다시는 캠핑생활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악몽 같은 기억만 났던 것이다. 결국 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두고 한 번도 천막 안에서 자본 일이 없을 뿐더러 천막 안에 들어가 본 일도 또 천막을 만져 보지도 않았다. 이만하면 나의 고집도 어지간한 편이다.
어죽
여름이 되면 나는 친구들과 함께 능라도의 수양버들 밑에서 어이죽(어죽) 쑤어 먹기를 좋아하였다. 집에서 냄비와 그 밖의 재료를 가지고 대동강으로 가서 대동문 앞에 있는 매생이(대동강에서 타던 특유한 작은 배)를 빌려 타고 능라도로 건너가 수양버들 밑에 좋은 자리를 잡는다.
우선 냄비를 걸어 놓고는 가지고 간 장작으로 강물을 끓이면서 한편 닭의 목을 따고 끓는 물에 잠시 넣었다가 꺼내어 털을 뽑는다. 그리고는 물을 갈아 다시 끓이면서 그 닭을 푹 삶고는 나중에 그것을 꺼내서 살을 잘게 찟는다. 그리고 가지고 간 쌀과 쇠고기 등을 함께 넣어서 죽을 끓인다. 그런 후 헤엄을 쳐서 강 복판에 가 여기저기에 떠 있는 낚시 배에서 모래무치 등의 물고기를 사다가 손질해서 그것들을 어죽 냄비 속에 또 집어넣는다.
그리고 간을 적당히 맞추고 마늘과 파를 넣고 또 고추장과 계란까지 한 꾸러미를 통째로 깨뜨려 넣고 골고루 저면 이제는 어이죽이 다 완성된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엉터리로 만든 음식이지만 당시의 우리에게는 꿀맛 같이 기가 막히는 최고의 보양식이었다. 그리고는 헤엄을 치다가 돌아와서 그 죽을 한 공기 먹고 또 헤엄을 치고 와서 한 공기 먹고 이런 식으로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냄비의 죽은 다 없어진다. 이것이 평양에서 유명한 어이죽 놀이인데 여름방학이 되면 우리들은 으레 한두 차례는 이런 놀음을 하며 지냈다.
수영
당시 나의 수영 실력은 8Km정도를 거뜬히 헤엄칠 수 있을 정도였다. 대동문 옆에는 덕바위라고 불리는 큰 바위가 강가에 있는데 여기에서 옷을 벗고 물로 들어가 (수심 10m 가량) 우선 인도교 쪽으로 물길 따라 내려간 다음에 거기에서 방향을 돌려 물길을 거슬러 능라도까지 4Km정도를 올라간 후 다시 물길을 따라 덕바위까지 헤엄쳐 내려온다.
능라도 수양버들 앞에서 부터는 물줄기가 대동문 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므로 거기에서는 물 위에 그대로 떠있기만 해도 힘 안 들이고 덕바위까지 올 수가 있었다. 나는 대개 배영 자세로 그대로 누운 채 이렇게 떠내려 내려왔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문자 그대로 하동(물아이)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5, 6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나가 대동강 빨래터 옆에서 강뚝을 잡고 수심 10m가까이 되는 물속으로 들어가 혼자 수영을 하면서 배운 탓이 아니었나 싶다.
학생 데모
평양고보 2학년 때의 어느 날 상급생들이 우리 반으로 몰려와 모두들 운동장으로 나오라고 강요하였다. 몇몇 아이들은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책상 앞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민족운동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급생의 재촉은 성화와 같았다. 나는 형편을 살피면서 운동장까지는 나갔으나 선두에 서지는 않았다. 말 탄 경찰이 운동장 안을 빙빙 돌던 모습이 생각난다. 이 일로 말미암아 우리 학년 학생의 5분의 2가 퇴학을 당하였다. 160명 중에서 61명이 학교를 쫒겨 난 것이다. 그날 밤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싸워야 할 때라면 용감하게 싸워야 하지만 때가 아닌데 괜히 악을 쓰고 나서면 무의미한 희생만 당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