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동 일
홍익법무법인 대표변호사
2013년 9월 13일 서울법대 역사관에서 ‘취현(翠玄) 황산덕(1917-1989)의 법학세계’를 조명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그 때 나는 축사를 하기로 예정되었는데 내가 명예이사장으로 있는 동산불교대학의 법주·학장으로 계신 무진장 대종사의 다비식이 있는 부산 범어사에 내려가느라 참석하지 못하여 몹시 미안하고 서운했다. 그래서 황영준 회장의 부탁을 마다하지 못하고 여기에 추모의 글을 남긴다.
나의 은사 황산덕 박사는 말년에 근현대의 고승 경봉(鏡峰)스님이 주신 ‘취현’이라는 법호를 썼지만 동양학의 대가 김범부(金凡父)가 지어준 ‘석우(石隅)’를 애호하셨고 그가 저술한 법학서적에는 대부분 ‘석우’를 쓴 것으로 기억된다. ‘석우’는 우리 강토의 원류인 큰 돌의 한 구석을 맡으라는 뜻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책도 <석우 회고록>이기에 여기서는 경칭을 생략하고 ‘석우’라고 부르기로 한다.
서울대 명예교수 최종고 박사는 위 전시회에서 배포된 책자에서 석우의 사상 내지 정신세계를 7가지로 분류하여 기술한 적이 있다. 즉, ① 법철학자, ② 형법학자, ③ 교육행정가, ④ 법률가 정치인, ⑤ 불교인, ⑥ 문필가, ⑦ 인간 황산덕, 이렇게 나누었다. 이 가운데 나는 일곱 번째 ‘인간 황산덕’에 주목한다. 그가 타계한 후 2년만에 나온 유고집의 제목이 <법과 사회와 국가> (1991, 방문사)였던 것처럼 석우의 삶은 ‘법과 사회와 국가를 위한 삶’이었다고 확신한다.
석우가 제자인 나에게 베푼 귀한 인연을 잊지 않고 있다. 내가 서울법대에 재학 중이던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곧바로 나는 친구와 함께 1960년 2월 28일 대구 학생시위부터 그 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까지 59일간의 뜨거웠던 현장기록을 <기적(奇蹟)과 환상(幻想)>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이때 나는 이 책의 서문을 평소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존경해 마지않는 석우로부터 받아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당시 명륜동 집으로 찾아뵈었다.
큰 절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부탁 말씀을 드렸더니 즉석에서 쾌락하시고 바로 그 다음날 5월 29일(이승만 박사가 하와이로 도피하는 날) 원고지에 달필로 써주셨다. 그 때의 기억으로는 몇 자 고치지 않으시고 강의를 하시듯 또박또박 단숨에 쓰신 것 같았다. 그 내용은 지금 읽어봐도 예지가 번득이는 명문이었다. 특히 4·19혁명을 민족정기의 발로로 규정하고, 혁명의 행동자와 수습자가 달라진 점에 주목하여 앞으로의 혼란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래에 몇 줄 옮겨본다.
《혁명에는 두 단계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는 ‘행동’이고, 그리고 그 둘은 ‘수습’이다. 혁명의 수단이 아무리 평화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대대적인 정치개혁을 목표로 삼는 것인 이상 폭력이 수반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혁명은 먼저 행동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반면에 있어서 이 혁명이 부정을 타도하여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인 이상, 타도를 위한 행동의 다음에는 반드시 수습의 단계가 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함으로써만 비로소 혁명은 단순한 파괴와 구별될 수가 있다.
그런데 이때에 있어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행동자의 정신과 수습자의 정신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행동자의 손에 의하여 부서진 구질서가 수습자의 손에 의하여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혁명이 아니라 반혁명이며, 즉 반동(反動)이다. 따라서 이러한 반동의 세력이 대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행동자 자신이 계속하여 수습의 일을 맡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우리나라 4월의 학생혁명은 그것이 학생들만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순수성에 있어서는 세계사상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고상한 것이지만 반면에 있어서 행동의 주체가 된 학생이-연령의 탓으로-자신 수습의 주체까지는 될 수가 없으며, 따라서 그들의 고귀한 정신이 반동적 기성정치인에 의하여 역이용 당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우리는 솔직히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행동자는 학생이었고, 그리고 학생은 언제든지 또다시 행동에 나아갈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수습자가 만일 행동자의 정신을 거역하는 경우에는 여기에 분열이 일어나고, 그리고 이러한 분열은 결국 우리 민족의 불행으로 끝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고귀한 4월혁명의 뒤를 이어 수습의 중책을 맡게 된 기성정치인은 우선 무엇보다도 금번 의거의 주인공인 학생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허심탄회하게 듣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이 마당에 이르러서까지 종래의 타성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당파적 사심(邪心)을 고집한다면, 그들은 마치 태양광선에 직사된 병균과도 같이 그 생명을 부지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이 번 의거에 직접 가담했던 학생이 그 불타는 애국심에서 <기적과 환상>이라는 책자를 내놓게 된 것을 의의 깊은 일이라고 믿어 마지않는 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이번의 승리는 그들 개인의 승리인 것이아니라, 젊은 세대의 승리인 것이며, 그리고 오로지 젊은 세대를 통하여서만 발현되는 이 민족성의 승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를 모르면서도 확실히 자신의 속에서 민족의 정기가 약동하고 있는 것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자는 이것을 ‘민족정기의 체험기’라고도 부를 수가 있다...... 》
4·19 당시 고교생과 대학생이 주동이 된 4·19혁명에 대하여 57년이 지나도록 많은 평가와 해석이 있어왔지만 석우의 위 서문처럼 명확하게 집어낸 것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 후에도 석우는 다른 글에서도 일관되게 4·19에 대한 소신을 밝히고 있음을 보면 4·19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5·16 쿠데타 1년 후 1962년 5월 16일 동아일보 논단에서 석우는 아래와 같이 갈파한다.
“.....화랑은 무예를 겸비한 20세 미만의 소년들로 된 수양단체의 일원을 말하는 것인데 국가위급존망지추(國家危急存亡之秋)에 당면하여 나라의 청소년들이 일어나 신명을 바쳐서 구국운동에 헌신한 것은 화랑을 위시하여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후 불행하게도 이러한 청소년의 구국정신은 발휘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천여 년 동안 내려왔던 것인데 최근에 이르러 3·1운동 때에 잠깐 그 빛을 보였다가 드디어 지난 4·19 때에는 그것이 다시 한 번 크게 폭발하였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보아온다면 우리의 4·19는 이것을 천여 년을 잠복해 있던 민족정신의 재현이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