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할아버지의 교훈
할아버지는 매우 자상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잔소리가 무척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할아버지의 교훈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나 한명 뿐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내가 대학에 다닐 때였는데 그때까지 내 동생들은 아직도 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만이 할아버지의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할아버지는 특히 식탁에서의 예법에 대해서는 굉장히 엄격하시었다. 밥 먹으면서 입에서 소리를 내는 것, 밥그릇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먹는 따위, 숟가락이나 젓가락으로 식기에 부딪혀 소리를 내는 것들을 모두 엄하게 금지시켰다. 또한 그릇에 담은 밥은 다 먹어야 하고 만일 못 먹겠으면 미리 덜어놓고 먹으라고 가르치셨다.
냉면집 같은 데에 가서도 덧 주문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냉면 값을 내는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얻어먹는 사람이 나서서 수선을 떨면서 주문을 추가하면 그 꼴이 보기 사납다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식사를 하면서 환담을 즐기는데 대해서는 서양 사람들은 물질문명의 발달로 지금은 큰 소리를 치고 있지만 본래는 오랑캐였으며 그 본바탕은 상놈들이니 다 본 받을 필요는 없다고 일축하셨다.
할아버지의 이러한 교훈들은 나에게는 뼛속까지 배어있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나는 평생을 두고 이 교훈을 지켜오고 있다. 다만 할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시던 습관 중에서 내가 의식적으로 따르지 않은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한증(사우나)이다. 점심을 잡수시고 난 할아버지는 몸이 또 쑤신다면서 어머님한테 얼마만큼의 돈을 받아 곧 어디론가 나가셨다. 몇 시간 후에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기분이 참으로 상쾌하신 듯 보였다.
이렇게 한증을 즐기시던 광경을 매일 보아온 나는 어려서부터 한증은 절대로 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였다. 불필요하고 부담되는 습관은 되도록이면 기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 한 번도 한증탕에 가본 일이 없다.
여자에 대한 호기심
16세 되던 해의 여름이었다. 집근처의 큰 길에서는 매일 저녁 야시장이 섰는데 새로 나온 과일이 특히 눈에 띄었다. 나는 10전 짜리 동전을 귀에 끼고 외삼촌 배선만과 김봉관 그리고 김원찬과 함께 시장에서 수박 4개를 사서 하나씩 들고 만수대까지 걸어 올라가 수박을 먹으면서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환담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주고받은 말은 주로 여자에 관한 것이었다.
선친께서 운영하시던 평안 고무공장에는 300명 가량의 노무자가 있었는데 시골에서 평양으로 이사 온 외삼촌 배선만은 이 공장에서 여직원 감독하는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18세였고 많은 여자들과 접촉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들 중에서 그는 가장 먼저 여자의 생태 같은 것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사내가 그렇듯이 우리들도 곧 남자만을 우선으로 생각하였고 여자는 그저 남자의 뒤에 처지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서 하는 것을 보고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춘기에 들면서 지금까지 몰랐던 느낌을 여자에 대하여 품게 되었는데, 그러한 관계로 외삼촌이 단편적으로 털어놓는 체험담은 우리의 귀에 모두들 솔깃하게 들렸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매일 수박을 사 가지고 만수대에 올라갔고 그리고는 기대에 부풀은 마음과 호기심을 잔뜩 품은 채 밤늦도록 떠들다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들은 조금씩 남자가 되어갔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 남녀유별의 풍조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여자에 대한 관심은 있었으나 여자와의 교제는 아직 가져 보지 못하였다.
김형건
같은 반에 김형건이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황해도 출신으로 평양에서 하숙하고 있었다. 얼굴 모습은 승려와 같았고 대단히 근엄하였기에 군자라는 별명까지 붙어 있었다. 나는 매일 저녁 인정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였는데 거기에서 그를 자주 만나 점차 친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김 군과 같이 대동강 얼음판 위를 거닐게 되었다. 한참동안 미끄럼을 치면서 걸어 가다가 그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더니 갑자기 하늘은 대답하지 않는다(天不答), 라고 큰 소리를 질렀다. 하늘의 은덕이 고마워서 사람이 하늘을 향해 ʻ고맙습니다ʼ 라고 말해도 하늘은 끝내 응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때의 김군은 아마 금강경의 무주상보시의 도리를 순간적으로 느꼈을 런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이 말을 들은 나는 이상한 감명을 느끼게 되었고 그리고는 혹시 이 사람이 성자나 예언자라도 되는 분이 아닌가, 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때부터 나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를 대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반 아이들도 그를 군자라고 놀려대면서 기인 취급을 하였지만 나는 그들의 이러한 태도가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하루는 저녁에 그가 나와 같이 예배당을 찾았다. 목사의 설교를 듣는 그의 표정은 심각하였다. 그러더니 그는 쪽지에 글을 써서 나에게 전해주었다. 예수는 곧 나의 제자 인가 라는 글이었다. 이 쪽지를 본 나는 크게 당황하였다. 예배당을 나와 함께 걸어오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다. 구세주를 내가 친구로 모시게 되었으니 나는 이 사람의 베드로가 되리라.
이때부터 나는 더욱 더 김 군을 극진하게 대하였고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와 함께 인정도서관으로 갔다. 나는 고등수학의 책을 빌려다가 보고 있었고 그도 역시 나처럼 고등수학 책을 빌려 책상 위에 펴 놓고 있었다. 한참동안 정신없이 공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ʻ꽝ʼ 하는 소리와 함께 책을 앞에 놓고 졸고 있던 그의 머리가 책상을 내리친 것이다. 도서관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웃었고 그는 침을 흘리면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가 잠 때문에 수마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은 180도로 돌아 버렸다. 잠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구세주가 될 것인가. 그는 큰 소리만 치는 엉터리이고 그에게 엉뚱한 기대를 걸었던 것이 나의 실수라고 단정 짓고는 그때 부터 그를 멸시하기 시작하였다. 김 군은 그 후 평범하게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황해도로 내려갔으나 그 후 소식을 아는 동문은 한 사람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