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공과대학 (16회)

4학년이 되어서도 나는 계속해서 고등수학과 자연과학 공부에 몰두하였다. 아직 양자역학의 존재는 알지 못하고 있었고 전기학에 특히 흥미가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좋아하는 자연과학 공부를 잠시 중단하고 입학시험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동경제국대학의 공학부로 가기 위해서는 동경에 있는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친께서는 내가 일본으로 유학 가는 것을 반대하셨다. 당시 평양의 모모한 인사의 자제들이 일본에 가서 공부한다고 하면서 시시껄렁한 사립대학에 적을 걸어 놓고는 공부는 하지 않고 여자들하고 어울려 다니면서 한 달에 수백 원씩의 돈만 쓰고 있었던 것인데, 이러한 사례를 많이 보아 오신 선친께서는 내가 일본에 있는 대학에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면서 또 극력 반대하셨다.

그런데 경성제국대학에는 자연과학이나 공학과가 없었으므로 당시의 나로서는 이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선친께서는 나에게 이 대학의 의학부로 가라고 권하기도 하셨지만 나는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리하여 선택한 것이 만주에 있는 여순공과대학이었다. 만주를 침략한 일본이 그 기반을 굳히기 위하여 세운 대학이었는데 만주의 남쪽 끝에 있는 군항 여순에 위치하고 있었다. 선친은 내가 이 대학에 지원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이리하여 18세 되던 해의 3월 나는 단신으로 평양을 떠났다. 떠나기에 앞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선친의 격려와 어머님의 배웅을 받으며 짐 보따리 들고 집에서 나왔다. 전차를 타고 평양역으로 가서 여순까지 기차표를 사서 짐을 맡긴 후 기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몇 시간 후에 신의주역에서 내렸다. 거기에는 큰 고모님의 식구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 밤을 거기에서 지내면서 사촌형들과 영화 구경을 가기도 하였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신의주에는 가본 일이 없다.

다음날 아침 나는 역시 고모댁을 나와 기차를 타고 압록강 다리를 건너 만주로 들어갔으며, 흑산, 흑토, 흑가, 흑의만 보이는 만주 벌판을 한없이 달려갔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기차는 봉천에 못 미치는 어떤 역에 도착하였고 나는 거기에서 내려 대련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탔다. 아시아호라고 불리는 호화열차였는데 만주의 평야를 한정 없이 달려 마침내 대련에 도착하였다.

▲ 일제시대 평양고보

하루 밤을 여관에서 지내고 다음날 아침에 여순으로 가는 기차를 잡아타자 불과 한 시간만에 경비가 무시무시한 군항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나는 일본인 거주지역과 중국인 거주지역의 중간에 위치한 여관을 잡아서 투숙하였다.

나는 이곳 대학의 전기공학과에 지원하였던 것인데 기일이 되어 입학시험은 시작되었고 나는 내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다만 일본어 시험에 있어서 단어 하나 만을 잘못 썼는데 일본어로 활시위가 무엇인지를 몰라서 2점을 깎이고 말았다. 그 밖에는 내가 생각해도 신통하다고 할 정도로 참으로 시험을 잘 봤다.

그런 후 나는 곧 평양으로 돌아와 조용히 회보를 기다리면서 합격은 틀림없다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대학의 학부 졸업반에 있던 장모라는 선배가 나의 성적을 편지로 알려 주었으므로 나는 수석으로 합격할 것 같다고 장담까지 하였다. 당시의 일본의 일류 학교에서도 60퍼센트 정도의 성적이면 합격이 가능하였으므로 나의 자신감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얼마 후 내가 그 대학으로부터 받은 소식은 불합격이라는 통지서였다. 이것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러자 여순에 있는 장 선배로 부터 곧 편지가 왔다.

작년 가을 경성에서 삼택사건이 터진 탓으로 조선인 학생은 받지 않기로 학교 방침이 세워졌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의 농업경제학 담당 삼택(미야께)교수를 중심으로 경성제대 의학부, 봉천에 있는 남만주 의과대학 그리고 여순공과 대학에 재학 중이던 조선인 학생이 공산주의 써클을 형성하고 있었음이 발각되어 미야께 교수는 일본으로 쫒겨가 동경제국대학으로 자리를 옮겼고, 조선인 학생들은 모두 퇴학당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삼택사건 이었으며 이것은 내가 여순공과 대학의 입학시험을 치르기 불과 몇 달 전에 터진 사건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성적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불합격이 되었고 이것이 나에게 준 충격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지내 왔었다. 내가 좋아하던 학문은 자연과학이었고 그리고 이 학문에는 국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나는 내가 과학도이기 전에 먼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일본 학생들보다 개인적으로는 조금도 부족한 점이 없지만 내가 조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처럼 차별 대우를 받는 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이처럼 비통한 마음으로 나는 4학년을 마치고 본의 아니게 5학년으로 진급하였다.

당시의 학제에 의하면 일본의 중학교나 조선의 고등보통학교는 모두 5년제였다. 그리고 대학에 가려면 일본의 고등학교나 대학 예과를 거쳐야 하는데, 여기에는 중학교나 3고등보통학교의 4년 수료자이면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머리가 좋은 학생은 4년을 끝마치고 곧 일본의 일류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가 있었으며, 따라서 그냥 5학년에 진급하여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다는 것은 그 학생이 4학년을 끝내면서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졌다는 근거로 취급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고등보통학교의 5학년에 진급하여 재학하는 것은 당시에는 그리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그때에 나와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 중 몇몇은 당당하게 일본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