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와 나-2 (18회)

몇 년 전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다니다가 삼택사건으로 퇴학당한 한 학생이 종로구 원남동에서 고서점을 차려놓고 있었다. 이곳 책방 주인에게 잘 부탁하면 독일어로 된 좌익서적을 구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서 나는 Reclam 문고판으로 나온 공산당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과 일본 공산당에서 영인본(사진 찍어 만든 책)으로 내 놓은 마르크스의 자본론(Das Kapital)을 구입하였다.

결국 내가 독일어로 된 좌익서적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둘 뿐이었다. 그 후 원남서점은 그의 동생의 손으로 넘어가 해방 후에 이르기까지 이 책방은 우리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그 동생은 어느 날 저녁에 길을 나섰다가 깡패의 습격을 받아 뇌를 다쳐 수술을 받았는데 그 후부터 그의 서점 경영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5.16 이후에도 그는 나를 찾아온 일이 있었으나 지금은 소식이 없다.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르지만 그는 나를 매우 좋아하였다.

이렇게 되어 나는 프랑스 말을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달 후에 나는 사전을 찾아 가면서 프랑스 책을 읽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다시 마루젠 서점을 찾았고 여기서 나는 새로 나온 앙드레 지드의 '러시아에서 돌아오다(Retour de lʼ URSS, 1936)'를 발견하였다.

지드는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인이었고 일본에서도 지드 전집이 발간되어 매일과 같이 신문광고에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도 지드라는 이름만은 알고 있었고 그러한 지드가 스탈린의 초청으로 1935년에 모스코바로 가서 소련의 문인 고르키의 장례식에 참여했다는 소식을 신문 기사를 통해 읽은 일이 있었는데 바로 그가 소련으로부터 돌아와 이 책을 쓴 것이다. 두 말 않고 나는 이 책을 사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서 열심히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이상한 대목이 자꾸만 튀어 나왔다. 내가 그처럼 이상천국으로만 생각했던 소련이 지드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가 않았던 것 같았고 때로는 비판적인 대목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하루는 초라한 모습의 부카린이 자기 숙소로 찾아와 이렇게 말하고 갔다고 한다.

“당신은 스탈린에게 속아서 여기에 왔소. 고르키는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스탈린이 죽인 것이요. 나도 아마 그의 손에 곧 죽을 것이니 그가 보여주는 것을 순진하게 믿고 그대로 서방 세계에 알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시오.”

부카린은 소련 안에서도 마르크스나 엥겔스, 레닌 다음으로 으뜸가는 공산주의 이론가이고 나도 그의 책을 여러 권 읽은 바가 있다. 그런데 그런 부카린이 소련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불만이 있고 그리고 그 때문에 지금 죽음의 공포 앞에서 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지드는 P.S.의 표시를 하고서 자기가 프랑스로 돌아온 이후에 부카린은 그의 말대로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어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앙드레 지드의 Retour de lʼ URSS (1936)

나는 지드의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나의 눈을 의심하였다. 내가 그처럼 마음에 그리던 마음의 조국인 소련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마 나의 프랑스어 독해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한 나는 그 책을 덮어두고 그리고는 이 문제에 관하여 잠시 덮어두기로 하였다. 그런데 약 6개월 후에 이 책의 번역판이 일본에서 나왔다. 프랑스 문학작품을 부드러운 일본말로 번역해 내는 것으로 이름난 굴구대학의 호리구찌씨가 쏘비에트 여행기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번역해 낸 것이다.

나는 이 번역본을 사다가 읽었고 부카린이 지드에게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확인하였다. 당시는 스탈린이 제1, 2차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나중에 얄타회담 때에 스탈린이 처칠에게 실토한 바와 같이 스탈린은 10여 년 동안 소련 국민의 약10퍼센트에 해당되는 1,000만 명 이상의 많은 사람을 죽였고, 그의 밑에서 내무상을 지낸 베리아도 300만 명을 죽였던 것인데 자기의 정책을 시행하기 위하여 국민의 10분의1 이상을 죽인 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폭정이 아닐 수 없다.

이리하여 조성된 공포 분위기가 지드의 책에서 폭로되어 있는 것이다. 호리구찌 씨의 번역판을 읽고서 나는 이 무서운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내가 공산주의를 좋아했던 것은 그 이론의 철저한 과학성 때문이었다. 공산주의 이론은 이와 같이 과학적이요 필연적이므로 구태여 폭력을 쓰지 않을지라도 역사는 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리하여 그 끝까지 간 것이 공산주의 사회이고 지금의 쏘련이 바로 그러한 사회이므로 여기에서는 국가 권력에 의한 강제나 법의 구속 같은 것은 필요 없고 모두가 무제한한 자유 속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폭력은 왜 있는 것이고 무엇 때문에 사람을 자꾸만 죽여야 하는가. 그것도 그저 몇 사람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으니 이것은 아마 공산주의의 이론 자체에 어떤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비록 공산체제를 찬양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죽지 않기 위해서이지 공산체제가 정말로 좋아서 그렇게 찬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당시의 일본에서도 공산당원끼리의 사적인 린치사건이 자주 신문에 보도 되고 있는 것을 보면 결국 공산당원들은 자기들끼리도 서로 죽이고 그리고 정권을 잡으면 국민들을 자꾸 죽여야만 유지될 수 있는 어딘가에 취약점이 있는 제도이고 이러한 사회가 어떻게 이상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호리구찌 씨의 번역판을 읽고나서 참으로 많은 고민을 하였다. 내가 2년 동안 그토록 심취해 있던 이 사상이 사실은 허위였고 조작이었단 말인가, 하는 말할 수 없는 허탈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사상일지라도 사람을 죽여야 하는 사상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지드가 그려낸 소련 안의 공포 분위기 이것은 생지옥이요 어떠한 말로서도 변명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생활상이었다. 이렇게 마음을 먹은 나는 그때부터 공산주의의 책을 멀리하였다.

20대에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는 청년은 정의감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30대에 들어서까지 공산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천치 바보다 라고 강조한 무쏠리니의 말이 생각난다. 그런데 이때의 내 나이는 겨우 스무 살이었다. 그후 나는 지드의 문장에 매료되어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었고 이리하여 21세 때에는 완전한 프랑스 문학광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