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고등보통학교의 5학년에 올라간 1934년 봄의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모란봉에 올라가 술을 마셨다. 여순공대의 일을 겪은 다음인지라 마음속의 우울함을 가눌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낮술이었기 때문에 얼굴이 빨개졌고 그런 상태에서 나는 친구들과 함께 대동강변을 따라 청류벽 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오는 일본인 교사들과 우리는 마주쳤다. 그중에서 서양사 담당의 이료[井料]선생이 소리 질렀다. ʻ황산덕, 너 술마셨구나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돌리고서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학교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삼 개월이 지나가고 7월이 되었다. 1학기 시험이 끝나고 5학년 학생 전원은 수학여행으로 만주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출발 전날 선친께서 학교에 불려가셨다. 교감선생이며 화학 담당인 마이야선생이 선친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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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동강변의 청류벽(사진출처 /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서운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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ʻ내가 조선에 와서 오랫동안 교편생활을 하면서 가르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둘뿐 입니다. 한 사람은 5년 전에 이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다니고 있는 오재걸 군이고(오 선배는 나중에 소아과 의사가 되었고 우리 집의 주치의를 해 주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은 황 군입니다. 그런데 황군은 지난봄 벛꽃 필 때에 모란봉에서 술 마시고 오다가 본교 선생님들에게 들켰습니다. 이 분들은 교감인 나에게 곧 보고 하였고 나는 반드시 모종의 처분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무척 고민 끝에 처분을 내리기는 해야 하겠지만 황군의 앞날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생각 끝에 나는 이렇게 결정하였습니다. 어제로써 1학기 시험은 모두 끝났고 내일은 수학여행을 가기로 되어 있으니 오늘 하루 황군에 대하여 정학처분을 내리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집에 돌아가시거든 황군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시고 오늘 하루 근신하고 있다가 내일 수학여행에 나오라고 말씀해주십시요ʼ라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고 하셨다.
마이야 선생이 어째서 나를 가르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으로 보아 주었는지 알 수는 없다. 오히려 나는 1학년 때 이 선생님의 실험실에서 있은 프라스코 농유산 사건 때문에 마이야 선생에 대해서는 다소 경원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하튼 이 말을 전해들은 나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사실 이때에 마이야 선생께서 악의를 가지고 내 일을 처리해 주었더라면 나는 상급학교 진출에 상당한 영향이 있었을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학교를 졸업하고 난 다음에 나는 더 이상 마이야 선생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