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이 되었다. 주초에는 대구에 가서 강의를 하고 주말에는 부산에서 강의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피로는 극심하였고 모두들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면서 강의실을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자연히 휴강이 많아졌다. 유진오 총장은 미국에 가 계셨고 부총장 이종우 씨가 총장 서리로 일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서리는 휴강 많은 교수의 보너스를 삭감하였다. 나도 물론 보너스를 삭감 당하였다.
기분이 상한 나는 미국에 계시는 유 총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부산과 대구를 왕복하다 보니 건강이 나빠져 휴강을 자주하게 되므로 고려대학을 그만 두고 서울대학으로 가겠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이에 대하여 유 선생은 황 선생이 모교로 가겠다고 하니 누가 막겠습니까 라는 회답을 보내 주셨다.
이리하여 나는 2월 19일자로 고려대학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런데 이 서리는 그것을 1월 31일자로 접수하였고, 따라서 2월분의 봉급을 주지 않았다. 아주 감정적인 처리였다. 이종우 씨의 야박한 처사로 결국 나와 고려대학은 씁쓸한 상태에서 관계를 끊게 되었다. 고려대학에서의 나의 근무기간은 5년을 넘지 못하였다.
부산에 피난 가 있는 동안 나는 처음에는 켈젠을 공부하다가 다음에는 새로 알려진 코잉의 법철학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다시 양자역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법철학에서의 문제를 최신 자연과학의 도움으로 풀어 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 있을 나의 박사학위 논문을 위한 준비 공작이 되었다.
4월 3일 영채가 영도에 피난 와 있던 경기여자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200m도 안 되는 거리였다. 좋은 학교에 입학해서 다행한 일이었다. 나도 해군법무관실에는 여전히 나가고 있었다. 여기에서 내가 주로 한 것은 트루만 대통령이 공포한 미 해군규정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해군규정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번역하여 제출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해군규정의 모체가 되었다.
오랫동안 끌어오던 전쟁은 7월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끝이 났다. 정부에서는 모든 공무원에게 곧 상경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나도 가족들을 데리고 8월28일 서울로 올라와 을지로 집에 들어갔다. 그 동안 중공군이 우리 집을 사용하였던 모양이지만 그들이 떠나갈 때에 본래의 모습대로 회복시켜 놓고 간 탓인지 집안에 있던 물건들은 하나도 없어진 것이 없었다. 인민군과는 달랐던 것이다. 서면에 계시던 부모님들도 곧 올라와 우리와 합류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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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수복 직후. 서울거리로 전화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을지로 입구인 수표동 네거리로 짐작된다.ⓒ NA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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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한 많은 피난살이는 끝났다. 전쟁이 끝난 것에 대한 우리의 기쁨은 대단한 것이었다. 비록 통일에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평화가 찾아와서 동족상잔의 비극은 없어졌기 때문이다.
서울은 1/3가량이 파괴되었고 그 파괴된 자리에는 임시로 술집이 들어섰다. 싸구려 약주에 곱창구이가 고작이었지만 우리들에게는 그 정도도 꿀맛이었다. 우리들은 매일 같이 그런 곳을 찾아다니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당시의 내 나이 36세.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술을 마셔 댔다. 이런 생활은 여러 해 계속되어 법과대학의 한태연 교수가 나의 주된 술 상대였다.
서울로 상경하여 나는 문리과대학 안에 있는 동양연구실 아래층에 방을 하나 얻었다. 그리고는 서울대학교에서 연구비를 얻어 켈젠의 ʻGeneral Theory of Law and Stateʼ를 번역하였다. 그 번역 원고를 12월 4일에 서울대학교에 제출하였으며 다음 해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나는 6.25 전에 켈젠의 순수이성법학(ReineRechtslehre)을 번역한 바가 있었지만 그 때에 나온 <순수법학>과 이번에 나온 <법과 국가의 일반이론>을 미국 버클리에 계시는 켈젠에게 보내드렸다. 나중에 내가 켈젠을 찾아갔을 때에 그의 서재에 꽂혀있는 이 두 책을 본 일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