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단의 종권이 비구승 측으로 넘어 왔으나 세상물정에 어두운 비구들은 종단을 제대로 이끌어 가지 못하였다. 심지어는 하나의 안건에 도장을 찍은 뒤에 그 반대의 안건에도 도장을 찍었으며 대개는 조계사 주변을 맴도는 탐욕스런 재가 신도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특히 여자 신도들의 횡포는 대단하여 불교 종단은 여신도들의 손에 의해 완전히 놀아나면서 갈팡질팡하였다.
나와 대법선은 종단이 무력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애를 썼으나 역부족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찰에는 소위 보살이라고 부르는 할머니들만이 출입할 뿐 천주교의 성당이나 예배당과 같이 젊은 사람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늙은 보살들을 상대로는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우리 내외는 종단을 떠나 불교계 역사상 처음으로 불교청년회를 조직함으로서 불교계의 체질개선을 하기로 하였다.
종묘 옆에 있는 대각사를 본거지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청년회의 명칭도 대각회로 하였다. 비용은 전적으로 내가 대학에서 받는 봉급에서 지출되었다. 신문지를 대량으로 사서 먹으로 계시문을 쓰게 하여 시내 곳곳에 붙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계시문을 보고 사람들이 모이면 처음에 박종홍, 고형곤 교수 등에게 부탁하여 실존주의에 대한 강의를 하게 하고 다음에는 청담스님에게 부탁하여 불교에 관한 강연을 하도록 하였다.
왜 실존주의 강의를 먼저 하게 하였는가 하면 당시의 우리나라 청년들 사이에서는 실존주의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미끼로 사람들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으므로 강사님들에 대한 강의료는 드리지 못하였다. 그리고 직접 자기 손으로 헌 신문지를 사서 먹으로 쓴 벽보를 풀로 붙이며 다니는 청년이 총무일도 보았는데 김경만, 이호식, 심재열(해병대원)등이 그때에 주로 활약하였다.
당시는 젊은 승려까지도 실존주의에 관한 책을 멋으로 들고 다닐 정도로 실존주의 바람은 대단하였고 또 박종홍, 고형곤 두 교수님은 그 방면에서 우리나라의 최고 권위였으므로 우리의 모임에는 많은 남녀 학생이 모여 들었고 대각사에는 항상 백여 명의 청년들이 들끓고 있었다. 그러나 강사료도 드리지 못한 두 교수를 계속 모실 수가 없어 나중에는 일본에 있는 불교대학에서 공부한 이종익 거사를 모셔서 대각회원들을 지도하게 하였다.
이 선생은 화엄학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계셨던 분이었고 또 대각회의 일을 헌신적으로 보아 주었다. 이리하여 성도 기념일에는 명동극장에서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고 초파일 봉축행사 때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청년학도들의 가두행렬이 있었다. 우리 내외가 시작한 불교 청년운동은 이제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할머니들만이 출입하던 사찰에 청년 남녀들이 들끓게 된 것은 대각회의 공적이 참으로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중 대각사 주지로 부터 나가 달라는 통고를 받았다. 청년들이 들끓고 있어서 불공 손님이 오지 않으니 손해가 막심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각사에서 쫓겨나 안국동에 있는 선학원으로 갔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불청객이 된 우리들은 조계사로 갔다가 나중에는 정능에 있는 경국사로, 결국은 교외에 있는 도봉산 망월사 등등으로 전전하였다.
이렇게 쫒겨 다니면서 얼마를 지탱해 오다가 스님들의 처사에 화가 나서 대각회를 아주 해산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심어 논 불씨는 그 후 죽지 않고 살아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성하게 자라 불교청년회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당시의 대각회의 청년멤버들은 60세가 다된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불교 발전을 위해 각종 형태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나는 이 해부터 대학에서 형법 강의를 맡기 시작하였다. 본래 법과대학의 형법은 유기천 교수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가 학위를 받으려고 미국에 가서 여러 해 동안 돌아오지 않고 있어 내가 이 과목을 맡게 된 것이다. 5월 7일 내가 쓴 형법총론강의가 위성문화사에서 출판되었다. 이것은 독일 형법학자 메츠거의 체계를 따른 것인데 졸저였으므로 곧 절판되었다. 1957년(41세) 무렵에 나는 주로 벨첼(Welzel), 하이데거(Heidegger), 야스퍼(Jasper) 그리고 막스웨버(Max Weber)를 공부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 군을 법과대학에 입학시키라는 정부의 압력이 있었다. 학생회장 이강혁 군과 부회장 남재희 군이 주동이 되어 학생들의 맹렬한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오랜 절충 끝에 80평생을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운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다는 뜻에서, 이번 한번만 특례를 인정하고 입학을 허가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리하여 대학 강당에서 윤일선 총장이 법과대학생들 앞에서 다시는 이러한 특례가 없으리라는 것을 맹세하였고 학생들이 그것을 박수로 받아 드림으로써 사태는 해결되었다. 사태해결을 끝내고 나서 나는 4월 2일자로 3년여 동안 맡아오던 교무과장직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8월 9일에는 한국 법철학회를 창립하여 회장이 되었다.
이 회장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맡고 있으나 회원 수가 적고 재정도 보잘 것 없어 이렇다 할 활동을 못하고 있다. 다만 최근 2. 3년 동안 심헌섭교수의 수고로 1년에 2번씩 연구 발표회를 가질 뿐이다.
1956년 가을 학기에 나는 대학원 교재로서 벨젤의 형법체계의 신형상(Das neue Bild des Strafrechts Systems. 2. Aufl.)을 사용하였다. 학생은 김종원, 안명기 두 사람 뿐이었다. 강의를 끝내고 나는 그 책을 번역하겠다고 독일의 벨젤 교수에게 문의하였다. 그랬더니 이제 곧 그 책의 3정판(3. Aufl.)이 나오니 그 책을 번역해 달라는 회신이 왔고 곧 이어서 그 책의 3정판이 항공편으로 왔다.
당시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운하를 봉쇄하였기 때문에 유럽에서 선편으로 한국까지 오는데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2개월이나 걸려야 하는 때였다. 따라서 이 책이 배편으로 수송되어 일본인 학자들의 손에 들어가기 2-3개월 이전에 나는 벌써 이 책을 입수하게 되었다.
원서에는 이미 1957년에 한국말로 번역되었다고 표기되어 있었다. 나는 밤낮을 쉬지 않고 번역하여 1957년 10월7일에 형법체계의 신형상이라는 제목으로 박영사에서 그 번역본을 출간하였다. 이 책의 원서가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한국에서는 그 번역본이 나온 것이 된다. 나는 이 책을 번역함으로써 벨젤의 목적적 행위론을 우리나라에 들여온 첫 지지자가 되었고 동시에 그 분과 나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훗날 나는 그 분을 한국에 초청하였고 그분 또한 독일 본대학의 총장이 된 후 나를 3개월 동안 독일에 초청하여 내가 추천한 정종욱 군을 그 분의 조수로 채용하여 키워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독일에 남겨두고 온 큰딸 영채의 뒷바라지를 해주시는 등 깊은 인간관계를 맺게 되었다. 벨젤 교수는 1977년에 돌아가셨는데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나는 일부러 독일에 가서 그 분의 묘소를 찾기도 하였다. 이때 독일 정부는 나를 국빈으로 예우해 주며 환영하였다. 두 사람 사이의 돈독한 관계는 바로 1957년에 시작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