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내가 한 일은, 흔히 얘기하는 화이트칼라 업무가 아니고 연구실에서 실험하는 게 전부였는데, 작업복으로 갈아입으면 거의 막노동에 가깝고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다 서울 화곡동에서 새벽 5시부터 움직여 오전 8시까지 출근해야 하는 일상이 매우 힘들었다. 퇴근도 정시에 하기 어려웠고, 동료와 회식하는 날 밤늦게 화곡동으로 귀가할 때면 더더욱 출퇴근에 대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나는 장거리 출퇴근을 접고 회사 근처 주안역 바로 앞에 하숙방을 얻었고, 그 후부터는 출퇴근하는 일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 당시 월급(12,000원 정도)의 절반은 하숙비로 지급했으니,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 정도의 수입으로는 도저히 내 장래를 보장할 수 없어서 업무 중에도 틈만 나면 새 직장을 찾아보았다.
그때부터 나의 ‘덤벼 인생’이 시작되고 있었다. 사실, 그 직장도 어렵게 구했는데 다른 직장으로 옮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다. 만일 옮긴다 해도 서울 부근이어야 하는데, 하급직원 신분에서 마음대로 근무지를 이탈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일단 서울 근처로 직장을 옮겨야 그다음 단계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은 월급에 만족할 수 없어 다른 직장을...
나의 군 생활 동안 동고동락하며 헤어지기 싫어 몸부림쳤던 조 중위 소식이 궁금했다. 조 중위는 능력이 있는 친구였기에 나의 제대 후 사회생활도 그 누구 못지않게 잘하고 있을 것으로 믿었다. 수소문 끝에 한남동 그의 집에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조 중위는 내가 제대한 직후 대위로 진급하여 서울로 전속되었다고 했다. 조 중위 모친 말씀으로는, 그도 내 소식을 기다리면서 한 번 찾아보겠다고 했단다. 내 불찰이었다. 제대 후 나 자신의 따분한 처지만 생각하고 소식을 전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좀 더 좋은 직장을 구한 뒤에 연락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시간이 그렇게 흘렀던 것이다.
조 대위가 소속된 부대는 박정희 대통령 특명으로 세워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건설 시설단이었다. 그러니까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건설을 위한 시설 관리를 군이 주도하기 위하여 유능한 공병장교들로 구성한 특수사업단이었다. 그 사업단장은 정○○ 장군 휘하에 영관장교들과 위관장교들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공병 엘리트 장교들인 셈이다.
나는 어렵사리 조 대위와 연락이 되었고, 조 대위는 시설단 행정장교로 전속되어 있었다. 헤어진 지 16개월 만에 반갑게 만났으며, 조 대위는 여전히 좋은 친구였다. 만난 장소는 지금의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위치한 청량리 현장사무소였다. 조 대위는 시설단장 정 장군과 동료 장교들한테도 일일이 나를 소개해 주었다. 나는 제대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지만 이미 해버렸고, 다른 어떤 곳으로 다시 덤벼도 장래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 대위와 제대 이후 취직 문제를 비롯하여 컨트리클럽에서 창피당한 일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 대위는 그 나름대로 자랑거리를 많이 늘어놓았다. 그 내용인즉슨, 자기가 곧 결혼하게 될 것 같은데 신부는 인천에 있는 모 초등학교의 교사라고 했다. 인천? 인천이면 내가 근무하는 지역이기도 해서 앞으로 계속 만날 기회가 우연히 마련된 셈이기도 했다.
그런데 조 대위 부모님께서 그 여성을 반대하고 계시니 나보고 지원사격을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예전에 내가 한남동 조 대위 집에서 그의 부모님을 몇 번 뵌 적도 있었다. 나는 서슴없이 ‘내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지원을 적극적으로 해주겠다.’고 나섰는데 그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얼마 후에 조 대위는 인천초등학교 박 선생과 결혼했다. 그는 인천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는데, 신혼집에 가끔 들락거리는 내 마음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서울로 직장을 옮기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여전히 그 신혼집을 드나들었다. 조 대위를 만날 때마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써서라도 내 직장 이동 건에 대해 강력히 요청했다.
조 대위가 내 직장을 찾기 위해 노력
1965년, 그 무렵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국가재건 지도력이 발휘되던 때였다. 대통령의 특명으로 구성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건설 사업단의 위력도 그런대로 어딘가에는 먹혀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대에서 같이 생활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망설임 없이 조 대위에게 부탁했고, 조 대위도 나름대로 나를 위해 사방으로 열심히 노력 중임을 알 수 있었다.
조 대위는 나한테 자주 연락을 하면서 자기 신혼생활의 재미있는 얘기도 곁들여 해주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부러웠다. 그는 정말 좋은 친구이자 형님과 같은 존재였다. 당장 새 직장으로 옮기지는 못했어도, 그 친구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이 내게 큰 힘이 되었고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인천에서의 하숙생활과 연구실 겸 공장생활은 여전히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러던 중 회사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회사가 외부에서 받은 원조자금(Unkra?)으로 제2공장을 건설하게 되었는데, 미국의 스윈들 드레슬러(Swindell Dressler) 회사가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미국회사는 도자기, 타일, 내화물을 굽는 소성로(Kiln) 축조에 기술을 제공하게 되었다고 했다. 내화물(Refractory)을 제조하는 기업이었는데, 여러 나라에 자회사를 거느린 세계적인 규모였다.
어느 날, 이상무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제2공장 건설에 필요한 영문책자를 건네주셨다. 그 책자는 미국회사가 제시한 건설설계 도면과 시방(Specification)이 설명된 광범위한 에프엠(FM, Field Method) 자료였다. 이어서 이 상무님은 제2공장 건설을 위해 미국 기술자들과 협력하라고 하셨다.
왜 나를 지명하셨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지시를 받고 나서 내 예감이 이상했다. 어쩌면, 미국사람들을 통해 나도 외국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 당시 미국은 꿈의 나라이자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이 지상 최고의 낙원이요, 꼭 가보고 싶은 나라였다. 아무나 갈 수도 없는 천국 같은 나라라고 생각했었기에 미국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그때는 어디서든 미국사람들과 마주치면 멀리 피해버리는 것이 보통 한국인들의 태도였다. 그 이유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영어실력이 우수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자신도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다른 과목에 비해 영어공부는 늘 해왔었다. 예를 들면, 대학 시절에 중·고등학생들을 상대로 영어 아르바이트를 했었고, 대학교재 중의 하나였던 요업계산(Ceramic Calculation)을 내 나름대로 번역하고 정리해서 친한 친구에게 건네준 경험도 있었다.
그런 예를 보더라도 영어가 나와 밀접한 과목임은 틀림없었다. 나는 기꺼이 미국회사의 영문책자를 받았다. 사전과 씨름을 해가면서 번역하고 미국인 기술자와 대화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