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희망과 기쁨을 느낀 동시에 두려움도 생겼다. 인천을 떠난다는 것은 희망과 기쁨이었고 두려움은, 교수로 임용될 경우 과연 그 당시의 내 실력으로 전문대학생들을 가르칠 수나 있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비록 미리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었지만, 교수라는 신분이 현실화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머릿속에서는 내 실력에 대한 불안감이 떠나지 않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호주 스윈들 드레슬러에서 날아온 편지
그렇다고 당장 학교로 나를 불러들이는 것도 아니어서 그럭저럭 지내고 있던 무렵, 이번에는 호주 스윈들 드레슬러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편지에 서명한 사람은 캔 모란(Mr. Ken Moran) 으로 되어 있었고, 직함은 매니징 디렉터(Managing Director)였으니까, 요즘 표현으로 CEO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편지 내용은, 만약 호주에 오게 되면 자기한테 연락해도 좋다는 것이었고, 자기 회사에서 일할 기회가 있을 수도 있으니 그때 연락을 주겠다고도 했다. 어찌 보면 캐나다의 답장보다는 훨씬 긍정적인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미국인 기술자는 제2공장 임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캔 모란에게 “내가 호주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바란다.”라며 좀 과장하여 내 소개를 덧붙인 답장을 보냈다. 그때부터 그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내가 편지를 보내면 반드시 그쪽에서 간단한 답장이 왔는데, 그것이 서양 사람들의 특징인 것도 알게 되었다.
그분과 나눈 편지내용을 대충 정리해보면, 호주의 스윈들 드레슬러 회사에서는 호주 입국 건을 관여하지 않으니, 호주에 입국하려면 캔버라(Canberra) 연방정부 이민성과 접촉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친절하게도 이민성 장관 이름, 주소, 전화번호 등을 너무나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자기가 호주 이민성에 연락하여 무엇이 필요한지를 물어봐 주겠다."라고도 했다. 그는 아주 친절한 사람이었다. 백인들은 다 그런 걸까? 의심이 생길 정도였다.
캐나다에서도 비슷한 답변을 보내왔지만, 캔 모란만큼 상세하지는 않았다. 나는 계속 그들과 편지를 교환하며 가능한 내가 호주에 들어가서 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그 당시에는 호주 역시 서울에 대사관이 없었고, 홍콩에 있는 사람이 한 달에 몇 번 정도 서울에 와서 영사 업무를 본 후에 다시 홍콩으로 되돌아가는 식이었다.
호주라는 나라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백호주의를 내세워 백인들 외에 유색인종의 이민은 허락하지 않으면서부터였다. 전 세계 사람들이 호주의 백호주의를 비난하던 시기였고, 한국인이 호주로 취업 이민을 간다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도 없던 무렵이었다. 심지어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은 그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여건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다는 억측도 돌았다.
그때 마침 호주 수상 존 고든(Mr. John Gorden)이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호주 수상이 한국을 방문하여 얻어낸 성과를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한·호 공동 코뮈니케에서 ‘호주가 더는 백호주의를 표방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표방한 덕분에 내가 호주에 이민 가는 일이 더 수월했는지는 몰라도 모든 흐름이 나를 도와주는 듯했다. 캔 모란의 도움도 그렇고, 호주 수상의 반백호주의 한국 성명도 내 꿈을 펼치는 데 날개를 달아주고 있었다.
캐나다 스윈들 드레슬러 담당자로부터의 편지
그때 캐나다 스윈들 드레슬러 담당자에게서도 편지가 날아왔다. 캐나다에서는 일단 각 주(Province)에서 실시하는 엔지니어링 협회 인증시험에 합격이 되면 일자리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시험? 당장 내 반응은 ‘불가’였다. 내가 어떻게 그런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시험합격은 ‘절대 불가’라는 결론이 나왔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주마다 엔지니어링 협회가 있고, 그 협회 주관의 인증시험에 합격해야만 그 주에서 전문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제도이다. 그 시험에 불합격되면 노동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기회마저도 놓치기는 너무 아까웠다. 노동자로 일해도 지금보다는 생활이 나아질 수 있고, 영어라도 더 배울 수 있다면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시험을 보면, 백발백중 떨어질 걸 예상했지만, 핑계 삼아 캐나다로 가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도 간절했다. 일찍이 우리 선배들 중에는 일류대학 졸업자들도 독일에 광부로 취업 이민을 가지 않았던가? 시험을 핑계 삼아 캐나다로 떠나볼 생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호주가 백호주의라는 이유만으로도 캐나다에 가서 그런대로 살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덤벼 인생’에 매일 고민이 이어졌다.
해외취업을 타진 하던 중 결혼 문제가...
1968년 1월, 추운 날씨였다. 나는 주안역 앞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토요일 오후에는 서울로 올라왔었다. 내가 다니던 화곡동 교회에서 찬양대 봉사도 하고, 식구들도 만나고 그 다음 날 저녁에 다시 하숙집으로 내려가곤 했다.
슬하에 8남매씩이나 둔 까닭에 아버지는 자식들의 결혼을 몹시 서두르시는 편이었다. 내 위로 3명은 이미 결혼을 했지만, 나를 포함한 4명의 동생들은 아직 결혼과는 거리가 먼 처지였다. 그러나 기회 닿는 대로 누구든 결혼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어느 토요일, 느지막이 집에 들어갔더니 아버지께서 처녀 사진 두 장을 건네주셨다. 우리 교회 집사님의 조카라고 하시면서 괜찮으면 선을 보자는 것이었다. 26세의 나이에 월급으로 하숙비 주고 용돈 겨우 챙기는 주제에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더욱이 방 한 칸도 얻을 수 없는 형편이었고, 이제나저제나 외국으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판국이 아니었던가. 그나마 내가 외국으로 가려는 목적이 유학도 아닌 취업 때문이었다.
그것뿐인가? 신사복 한 벌 변변히 없고, 부모님 용돈도 넉넉히 못 드리는 처지에 무슨 선이고 결혼이란 말인가? 어림도 없는 제안이라며 사진을 내팽개쳐 버렸다. 그리고 앞으로 처녀와 선보는 등 결혼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아 주실 것을 완강하게 말씀드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계속 반강제적으로 말씀하셨다. ‘소(Cow)도 언덕이 있어야 비빌 수 있고, 사람도 기회가 있을 때 잡을 수 있는 법이다.’ 어른들의 충고는 언제나 교훈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