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엄두할 수 없었던 결혼
그러나 일요일이면 나는 다시 인천으로 내려가 버렸다. 서울에 오면 똑같은 대화를 반복해야 할 것 같아 한동안 서울에 오기 싫기도 했지만, 주말에 어디 갈 데도 없고 일요일 예배에도 참석해야 해서 그대로 왔다. 올 때마다 아버지는 같은 제안을 하셨고, 일단 아버지의 체면도 생각하고 중매인의 입장도 무시할 수 없어 처녀 사진이 든 봉투를 들고 하숙집으로 내려갔다.
밤늦게 하숙집에 도착하여 그 봉투를 방 윗목에 던져놓고 5일쯤 지났을까? 아침에 화장실에 갈 때는 읽을거리를 들고 가는 습관이 있어서 무심코 그 사진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일단 사진을 보고 나서 아버지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였다. 사진을 보니 갸름한 얼굴에, 몸매는 호리호리하고, 머리띠를 한 긴 머리카락이 목까지 내려와 있었다. 명함판 두 배 크기의 사진이었다. 더구나 한 장도 아니고 두 장이라? 대학교 재학 중 찍은 사진 같기도 했는데, 아주 앳되고 선해 보이기는 했다.
사진들을 봉투에 넣어 다시 윗목에 던져 놓았다. 그런데 그냥 접어두기에는 뭔가 아쉬운 생각도 들어 아침에 사진 봉투를 가방 속에 넣고 출근했다. 출근길에 그 사진이 떠올라 거듭거듭 생각해봐도 내 처지에 선을 본다거나 결혼 따위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고 너무나 과분한 느낌이 들었다. 아서라, 아서! 선을 보는 차체가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마음을 정리해버렸다. 그 처녀에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고 열악한 내 형편이 문제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선을 볼 것인가 말 것인가 또 갈등이 생기기도 하면서 어느새 회사 정문에 도착했다.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업무를 시작했지만, 내 머릿속은 온종일 그 생각에 휩싸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해외 원조자금으로 새로 지어놓은 제2공장 가동 때문에 시험실 기사들의 업무가 바빴지만, 한편 적당히 놀려고 마음먹으면 온종일 놀 수도 있는 곳이 바로 시험실 일이었다.
그날따라 일을 하기가 매우 싫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신세타령도 하고 농담도 하는 대학친구인 이영호를 부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그 친구와 몰래 숨어서 농땡이를 부리는 곳이 바로 타일을 굽는 소성 터널 가마 뒤쪽이었다. 그곳은 웬만해선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는 장소라, 가끔 가서 쉬기도 하는 공간이었다. 그날도 뒤숭숭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영호와 몇 시간 동안 거기서 보낸 기억이 난다.
교회에서 얼굴이 마주친 여인
그 처녀의 사진을 본 후에도 나는 서울에 올라왔다. 사실, 서울에 와봤자 마땅히 할 일도 없었지만, 어쨌든 올라올 때마다 아버지는 그 처녀와 선을 안 볼 생각이면 사진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어느 일요일에 아주 이상한 일이 생겼다.
일요일 예배 때 나는 찬양대 뒷줄에 앉아 있었는데, 그 예배당은 교인석의 교인들 얼굴이 대충 보이는 작은 공간이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보지 못하던 중년부인이 예배당 뒷좌석에서 내 쪽을 뚫어지게 보는 게 아닌가? 순간적으로 예감이 이상했다. 나를 바라보곤 하는 그 부인의 모습이 사진에서 본 그 처녀의 얼굴과 너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색 한복을 아주 곱게 입었던 걸로 기억한다.
찬양대 쪽을 바라보는 횟수가 아주 잦았지만, 설마 나하고 관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러나 예배시간 내내 왠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설렘이 나를 사로잡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배를 마친 후 나는 평소처럼 가까운 교인들과 젊은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집에 돌아왔다.
오전 11시 예배를 마치고 12시 30분쯤 집에 돌아오면 점심을 먹으며 식구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때 밖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시며 잠깐 밖으로 나와 보라고 하셨다. 입고 있던 옷차림으로 대문 밖에 나가니 예배시간에 줄곧 찬양대를 지켜보시던 그 부인과 중간에서 소개하신 처녀의 친척과 아버지가 서 계셨다.
사진으로 본 그 처녀의 어머니가 틀림없었다. 나는 그분들께 인사를 올렸다. 그 친척이 동시에 말문을 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좀 미안합니다. 이미 아버님께는 전에 연락을 드렸었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월 ○일 만나 뵐 시간이 있으신지요?” 그 순간 ‘나처럼 형편없는 처지에, 월급도 쥐꼬리처럼 적어서 혼자 먹고살기도 힘든데, 결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등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 순간 내가 ‘시간이 없다’고 하면 일은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 부인은 절세미인이었고, 나를 대하는 언행도 우리 집에서는 보기 어려울 만큼 예의가 깍듯했다. 왜 만나자고 했는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나로서는 ‘시간이 있다 또는 없다’ 대답만 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어느새 나는 대답을 해버렸다. “네…. 그 시간에 서울로 올라오겠습니다.”
마침내 보게 된 맞선
1968년 4월 초순쯤에 만나기로 약속되었다. 장소는 명동 입구에 있던 제일다방이었다. 처음 만난 분들이고 선을 보는 자리였지만, 나는 변변찮은 양복을 꺼내서 다림질해 입었다.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오는 동안 마음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 설마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것은 아니겠지? 어른들 체면도 있고 중간에서 노력하신 분들의 입장도 생각해서 만나 인사 정도나 나누고 나오면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예의상 몇 번 만나면서 처녀의 자존심을 살려주고 내가 외국 가는 일이 결정되는 순간에 없던 일로 해버리면 될 듯했다.
아버지께서 선을 보라고 하셨을 때나, 그 처녀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나, 선을 보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로 떠날 때나, 설마 결혼까지 가겠냐는 내 마음은 변함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선을 보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시골냄새를 물씬 풍기는 어머니와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항상 얼굴에 시름이 가득한 아버지가 제일다방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비록 부모님의 모습이 남루했지만, 그래도 자식 결혼을 서두르시는 부모님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져 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내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전방 소대장이었는데 그 당당하던 자세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마지못해 일하는 사람처럼 수동적인 자세로 부모님과 나는 다방 한복판에 자리 잡고 앉아 상대방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교회에서 본 그 부인, 중매하신 친척, 젊은 청년 한 명과 처녀의 아버지로 보이는 중년 신사, 그리고 그 옆에는 사진에서 본 호리호리한 처녀가 하늘색 투피스 정장 차림으로 들어왔다. 다방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더라면 좀 덜 어색했을 텐데, 한복판에 앉았기 때문에 8명이 서로 인사 나누는 장면이 마치 여느 상인들의 대협상자리 같고 웃기지도 않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