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결혼을 서둘렀지만...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아버지께서 갑자기 “동생들이 4명이나 있고, 할 일도 많으니 우리가 아직 기력이 있을 때 한 명이라도 빨리 결혼을 하면 좋겠다.”라며 결혼은 그해 가을에 하고 약혼은 7~8월쯤으로 서두르자는 것이었다.
약혼? 결혼? 뭐, 돈이 있어야지! 무슨 돈으로 그런 큰일을 치르라는 건지 막연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냥 놓쳐버리기도 아깝고 뾰족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부모님 심정이야 살아생전에 자식을 모두 결혼시키고 싶지 않겠는가. 부모님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지만, 맨땅에다 맨주먹으로 우물을 파라고 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아픔이 컸다. 두 주먹만 가지고 어떻게 그런 큰일을 처리할 것인지 도저히 계산이 서질 않았다.
아쉬운 마음이 앞섰지만, 결혼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나가려는 마음을 혼자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김 선생 댁에서 주말에 한 번 놀러 오라는 전갈이 왔다. 김 선생이 사는 곳은 시흥동이었다. 그 무렵, 시흥동에 가려면 주안역에서 출발하여 영등포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가거나, 또는 서울역에 내려서 안양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중간 지점인 시흥에서 내리면 찾아갈 수 있었다.
내 어려운 처지를 백 번 넘게 생각해봐도 선뜻 김 선생 집으로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지만, 김 선생과 몇 번 정도 식사하는 것은 큰 결례가 아닐 것 같아서 그 후 몇 차례 더 만나며 그녀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김 선생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한 것 중의 또 하나는 용돈이 넉넉하지 않아서 좋은 식당으로 그녀를 안내할 수 없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항상 어려운 내색을 할 수도 없고 딱한 상황이 종종 있었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던 즈음, 중간에서 김 선생을 소개하신 고모님이 아버지를 통해 김 선생 의지와는 상관없이 김 선생 부모님의 생각을 전해 왔다. 사윗감이 재정적으로는 어렵지만 장래가 있어 보이고, 가능하면 결혼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김 선생과의 대화로는 결혼 가능성이 없어 보였지만, 구체적인 제안은 어디까지나 양가 부모님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주말에 만나는 횟수가 잦아졌다. 만날 때마다 결혼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역시 교회활동과 하나님 말씀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때 즐겨 먹은 음식은 가장 저렴한 중국집 짜장면이었다. 내 주머니 사정을 알아차린 김 선생은 그렇게 비싼 식당을 선호하지도 않았다. 그 무렵, 김 선생 역시 집에서 부모님으로부터 ‘일찍 결혼하라’는 독촉을 받고 있음을 이런저런 대화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김 선생의 아버님은 젊은 나이(29세)에 교회 장로 안수를 받으셨는데, 살아도 하나님, 죽어도 하나님,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계시켜 생활하시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김 선생을 비롯한 모든 식구가 그의 아버지 명령에 불복하는 일이란 있을 수도 없는 절대 명령자였던 것이다.
반신반의 하던 중 그녀의 집에 초대 받아
그렇게 결혼담이 오갈 때마다 내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 김 선생이나 그 집안 때문은 아니고 열악한 내 형편 때문에 고민하던 중, 어느 날 회사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김 선생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주말에 시간 나는 대로 시흥에 들러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가라는 말씀이었다. 그 순간 흔들리던 내 마음이 정통으로 화살을 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엉겁결에 찾아뵙겠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던 시절이라 저녁 식사 초대에 귀가 솔깃한 이유도 있었고, 한편 거부할 별다른 명분도 없었다. 더구나 본인들의 생각과는 무관했지만, 양가 부모님끼리 결혼담이 오가는 시점에서 김 선생 집을 방문하는 일이 나로서도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김 선생한테 방문 일자를 알려주었다. 그 시절에는 토요일도 오후까지 근무했는데, 어느 하루 오전 근무만 하고 오후에 갈 기회를 만들었다. 인천 주안역을 출발, 영등포역에서 서둘러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오후 4시경쯤 시흥동에 도착했다.
그 전에 김 선생을 만나서 시흥 일대를 돌아다니며 장택상 씨 별장도 구경했었다. 그 넓은 대지에 99칸 방이 즐비하게 겹겹이 붙어있고 정원도 아주 훌륭한 산책길이었다. 그뿐인가? 대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많은 대문이 여닫히는 별장의 풍경을 보니, 예전 양반들의 삶이 과히 짐작되고도 남았다. 별장 옆을 끼고 흐르던 맑은 시흥천이 기억난다. 관악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시흥천을 통해 안양천으로 연결되었고, 시흥천에서는 아낙들이 빨래하고 채소도 씻는 아주 좋은 도시 환경이었다. 그 맑은 시흥천이 지금은 복개공사가 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몹시 아쉽기만 하다.
5시경, 김 선생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녀의 어머니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장가도 가지 않은 입장에서 ‘어머님’과 ‘권사님’ 중 호칭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망설이는 나한테 여러모로 편하게 대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일단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예의다 싶었고, 그 어머니 역시 나를 ‘임 군’이라고 불러주셨던 것 같다.
안정감이 느껴진 그녀의 집과 융숭한 대접
그때는 흑백 텔레비전만 가지고 있어도 부자 대접을 받았는데, 응접실에 들어서니 일제 소니 텔레비전이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 집에도, 내 하숙집에도 텔레비전이 없었다. 김일 레슬링 시합이 있는 날이면 텔레비전이 있는 이웃집으로 찾아가 멀찌감치 서서 흔적만이라도 느끼고 올 정도였으니까. 김 선생 집에 텔레비전이 있다는 것이 무척 좋았다. 그 집은 오래된 기와집이었지만 여러 가지로 안정감이 느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김 선생 아버지께서도 일찍 귀가하셨고 할머니도 계셨으며 다른 친척들도 그때 인사를 나누었다. 김 선생 어머니께서 손수 장만하신 음식들을 밥상 한가득 차려가지고 들어오셨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는 음식을 아주 맛있게 잘 먹는 일이다. 항상 배가 고팠기에 아무리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놓아도 먹어 치우는 게 어렵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내 별명은 ‘3그릇’이었다.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물 한 그릇이라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푸짐한 밥상은 그저 즐거운 비명거리였다. 그래도 체면이 있지 않으냐고? 그런 것은 없었다. 첫날부터 밥상 위의 모든 음식을 다 먹어치웠던 것 같다.
김 선생 어머니께서는 내가 맛있게 먹으니 기분이 좋으셨을 것이다. 첫날 김 선생 집에서 특히 고사리나물을 어찌나 맛있게 먹었는지, 그 후에도 김 선생 집에 갈 때마다 고사리나물은 내 단골메뉴가 되었다.
김 선생 아버지께서는 내가 하고 있던 시험실 업무나, 외국으로 나가려는 계획, 전방에서의 군 생활 등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말씀이 없으셨다. 그날은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귀가시간이 많이 늦었는데도 부모님께서는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날 그 집을 다녀온 내용이 궁금해서였다. 나는 그 집에서 결혼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고 말씀드리고 이튿날 새벽에 다시 인천으로 내려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