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결혼이라는 현실
그 이후부터 나는 가끔 김 선생을 서울이나 영등포에서 만나 식사도 하고 주말에는 시흥에 가서 그 댁 식구들과 식사도 했는데, 문제는 ‘결혼’이라는 부담스런 현실이 내 형편과는 상관없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상황이 결혼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김 선생 댁과 우리 부모님은 이미 결혼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신 것 같았다.
중매하신 고모님께서는 ‘7월이나 8월에 약혼식을 하고, 가을에 적당한 날 잡아 결혼식을 올리자’고 하셨다. 약혼? 돈 덩어리가 아닌가? 그 시절에는 결혼 전에 약혼이라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했고, 약혼식 때는 적어도 다이아몬드 3부 정도를 교환하는 것이 기본 상식처럼 되어 있었다. 도대체 다이아몬드 3부의 가격이 얼마 정도인지도 나는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다이어 3부는 고사하고 평범한 반지도 준비할 수 없는 처지임을 나 자신이 더 잘 알기에, 약혼은 아예 생략하자고 했다. 그러나 고모님을 통해 되돌아온 대답은, ‘약혼 없는 결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던 내 고민이 점점 깊어만 갔다.
약혼식 없는 결혼은 없다는 사회적 풍조를 거슬러 갈 수가 없었기에 약혼식은 서울 시내 한식당(기억 안 남)에서 올렸는데 양가 친척들만 모셨고, 약혼식 내내 목사님의 간절한 기도와 친척들의 축복 속에서 조용히 진행했다.
캐나다 몬타리오 주 엔지니어링 협회 면접
약혼식을 치르고 한참 지난 어느 날, 캐나다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 몬타리오 주 엔지니어링 협회에서 서류가 왔으니 그 서류를 작성하여 ○○월 ○○일 ○○호텔에 가서 간단한 면접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캐나다 몬타리오 엔지니어링 협회의 시험결과는 보나 마나 불합격될 것이 뻔했다. 그러나 외국으로 가는 일이 꿈처럼 어렵게 여겨지던 시절에 그런 제안을 거부하기에는 아까운 기회였다. 만약 협회시험에 떨어지면 노동자 신분으로 캐나다에 가서 살 수는 없을까? 그냥 여기서 이렇게 묻혀 살아야 할 것인가? 큰 번뇌였다.
캐나다 대사관 직원을 만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나 호주에도 접촉 중이니 일단 캐나다행은 포기하기로 마음을 정했다가도, 또 포기가 안 되어 결국은 정해진 날짜에 캐나다 대사관 직원을 만나러 호텔로 갔다. 캐나다 직원이 여러 가지 서류를 주었다. 서류를 받으며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생각났다. 막상 서류를 작성하려고 보니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며칠 동안 고심하며 작성하여 일단 그곳으로 보냈다.
약혼한 사람으로서 이제부터는 결혼식을 치러야 할 과제가 남아있었다. 신부 집에서는 결혼날짜를 많이 미루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고, 우리 집에서는 결혼식 일정에 대해 특별한 대책이 없는 상태였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그 해를 넘겨서는 안 된다는 중론으로, 결국 1968년 11월 30일로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결혼식을 위한 경제적인 여유가 내게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내가 할 일도 별로 없었다. 고모님 편에 들으니, 부엌 딸린 방 한 칸도, 가재도구도 처가에서 서둘러 준비하는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회사에 열심히 출근해서 월급이나 받아 저축하는 것뿐이었다. 한편 마음이 차분해졌다. 토요일 저녁에 김 선생 집에 들러 장모님께서 차려주시는 저녁밥을 맛있게 잘 먹는 것과 일요일은 우리 교회에서 예배드린 후, 김 선생과 데이트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어느덧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D 공업전문학교에서의 교수 제안
그 무렵이었다. D 공업전문학교 Y교장 선생님 댁에서 연락이 왔다. ○○월 ○○일 학교에 가서 교장 선생님을 찾아뵈라는, 아주 반갑고 손꼽아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나는 약속날짜에 맞춰 교장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소탈하게 웃으시며 아주 반갑게 나를 맞아주셨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학교에 나와서 본인의 일도 돕고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셨다. 사실 D 공업전문학교 교수 제안을 받은 셈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교수직으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시절에는 공업전문학교라고 부르기는 했어도 전문대학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호칭을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무척이나 기쁜 한편 교수직을 감당할 수 있을지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생겼다. 내년 신학기에 맞춰 모든 서류를 준비하여 이사회를 거치는 절차만 남아있었다. 거듭 생각해봐도 내가 교수가 되어 교단에 선다는 사실이 꿈만 같고 믿어지지 않았다. 과연 지금의 내 실력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전문대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지 나 자신에게 계속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대학원 석사 자격은 갖춰서 대학 교단에 서야 하지 않겠는가? 또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대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김 선생의 의견도 물어보곤 했지만, 근본적인 해답은 나 자신에게 있었다. 어쨌든 다니고 있던 직장에서 교수직으로 옮기면 월급을 3배 정도는 더 받을 수 있었다. 수입도 훨씬 많은 데다 사회적인 신분도 몇 단계 상승하는 것이었지만, 마음은 더 무거웠다. 신학기부터 강의하기로 되어있어서 늦어도 1968년 12월까지는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결혼식을 무난하게 치르는 일도 큰 과제였다.
마침내 결혼
아무래도 회사에서 ‘가불’을 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 총무과에 사정을 얘기했더니 다행히도 꽤 큰돈을 빌릴 수 있었다. 결혼식장은 덕수궁 뒤쪽에 위치한 ‘젠센선교사 기념회관’으로 정했다. 아마도 미국 선교부에서 건축을 담당하고 계신 장인이 정하신 것 같았다. 김 선생과 미리 답사해보니 아담하고 소박한 교회건물이었다.
결혼식 날엔 김 선생 쪽의 하객이 많았고, 우리 집 쪽에는 친척과 친구 몇 명 정도였다. 우리 결혼식에 특별히 참석한 하객 중에는 미국인, 미스터 젠킨스(Mr.Jenkins) 부부가 있었는데, 신랑 신부에게 자신의 자가용(링컨 콘티넨탈)을 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 시절에 미국 사람이 자기 자가용을 흔쾌히 빌려 줄 정도면 나하고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다.
젠킨스는 미8군 민간 군무원이었는데, 그 사람은 한국에서 군 생활을 마친 뒤, 한국여자와 결혼하여 화곡동 우리 집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Mr.Jenkins 부부)끼리는 물론 한국인들에게도 영어를 사용했다. 우연한 기회에 동네에서 알게 되어 시간 날 때마다 자주 만나 미국에 대해서 많이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내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기꺼이 본인의 자가용 사용은 물론 도자기 홈세트도 선물해주셨다.
그렇게 소박한 결혼식을 치르고 우리는 온양 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젠킨스 씨가 직접 운전하여 영등포역에 내려주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