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인정 받는 교수
약속한 날, 공병부대 중장비 중대장이 학교를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교장 선생님과 면담했고 나는 그 옆에서 통역의 역할도 했으니 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교장 선생님의 신임을 받을 기회였다. 그뿐인가? 그 시절에는 한국인들 대부분이 미국인 근처에 가는 것도 꺼렸는데 그 이유가 영어였다.
그 시절, 미군 대위를 모시고 서투른 영어로 말하며 운동장과 교실을 둘러보며 안내하는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에게도, 나는 그야말로 인기교수였다. 더구나 화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영어과 교수를 제치고 통역 비슷한 것을 하는 자체만으로도 학생들에게 내 인기도는 상승세였다. 학생들은 물론 동료 교수들까지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영어를 조금이라도 할 수 있으면 출셋길이 열리던 시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드디어 미8군 산하 불도저가 거대한 트레일러에 실려 고척동 학교부지 현장에 도착했다. 그 순간에 느낀 흐뭇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 추운 날씨에도 미군 불도저는 쉴 새 없이 움직였고, 부지조성 공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미군 장교와 대화하며 미군 중장비를 제공받은 사실은 내 영어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교수로 통할 수가 있었고, 학생들과 더 가까워질 기회가 되기도 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이전보다 나를 더 가까이하시면서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셨다.
부지가 조성되고 학교 건물이 들어서면서 내가 고척동 새 건물로 출근하던 무렵, 호주의 스윈들 드레슬러 회사에서 편지가 왔다. 발송자는 캔 모란이었다. “호주 스윈들 드레슬러 회사 이름으로 캔버라 이민성에 고용 추천을 했다.”며 그 사본을 보내왔다. 고용추천서를 증거로, 나보고 직접 호주 이민성 장관(기억 안 남)에게 고용이민 절차를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재밌는 학교생활을 보낼 때 호주 스윈들 드레슬러로부터 온 편지
학교생활에 아주 재미있게 잘 적응하던 시기에 받은 그 편지는 내 가슴을 다시 설레게 했고, ‘외국’이라는 단어가 또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학교생활이 어느 정도 정착되면 외국이고 뭐고 포기하고, 국내에서 대학원에 진학하고 한국에서 자리를 잡아가려던 참이었다. 더구나 교장 선생님의 신임도 두터워진 마당에 이런 편지라니! 좋으면서 불편한 것이…, 도대체 내 마음 나도 모를 일이었다.
호주 이민성에 연락 안 하면 끝나는 일인데도 쉽게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외국으로 나갈 수도 있다는 희망이 마음속에서 꿈틀대며, 한편은 현 생활의 즐거움을 막는 듯해 두려움도 일었다.
희망과 두려움 속에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밑져야 본전’이란 말이 그럴 때 쓰는 말이던가? 일단 캔 모란 사장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호주 연방정부 이민성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유는, 교수 직분으로 학생들을 충실히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지 못하면, 교수직이란 것도 잠시 머무는 임시직에 불과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국내나 외국에서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박사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호주에 간다 해도 기회가 닿는 한 그곳 대학원에 진학하여 좀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마음 바탕에 깔려 있었다. 남들은 유학 가서 접시 닦고 세탁일 하며 공부한다는데….
어찌 보면 고용이민을 간다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여겨졌다. 고달픈 인천 회사 생활보다는 사회적 지위로나 수입 면에서나 여러 가지로 보람을 느끼는 교수직을 접고 호주로 갈까 말까? 갈등하는 마음이란 말할 수 없이 무거웠다.
캔 모란 사장의 추천서와 조금 과장한 내용을 덧붙여 호주 이민성 장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무거운 마음으로 첫 학기를 보내던 중 호주 이민성에서 편지가 왔다. 문서 밑에 ‘호주 연방정부 이민성 장관’의 서명이 있었다. 그 편지에는 ‘호주에서 직업을 구하는 경우이기 때문에 고용이민에 해당된다.’는 내용의 성실한 설명과 호주대사관이 홍콩에 있으니 호주대사관의 이민성 담당자에게 연락하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나는 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에 가더라도 일단 홍콩으로 연락은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얼마 후 호주대사관 이민관한테서 안내장이 왔다. 업무수행 차 서울에 갈 테니 그때 이민서류도 접수하고 안내도 받으라는 것이었다.
교직으로 안주할까, 이민을 갈까, 갈등
마음이 더 복잡해졌지만 한 가지 안심되었던 것은, 일단 호주에는 직장을 제공할 수도 있는 캔 모란 사장이 있으니까 갔다가 설마 길에 주저앉지는 않을 거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발상을 했다. 순조로울지는 모르지만, 이민 절차를 진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하기 까지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 일찍이 14살에 할아버지를 여의고 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세상 보는 시야를 넓힌 본인의 경험담을 말씀해주시며, 어떻게든 국내보다는 외국으로 가서 큰 꿈을 펼쳐보라고 조언해주셨다. 막연히, 원대한 꿈을 펼쳐보라는 말씀에 황당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호주를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 하신 조언이었다.
아내 역시 호주 이민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나의 장래와 태어날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보면 그리 거절할 이유도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여러 정황상, 호주이민이 불가피한 선택으로 가닥이 잡혀갔다. 친한 친구 몇 명도 ‘그런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일이 아니다’며 이민 쪽으로 힘을 실어주었다. 그만큼 그 시절에는 국내 사정이 어려웠고, 무조건 외국으로 나가는 자체가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던 때였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은 교수생활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었다. 호주대사관에 편지를 보내고 한 달 정도 지나자, 호주대사관에서 또 소식이 왔다. 그때가 1969년 5월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6월 ○○일에 호주대사관의 이민관이 한국으로 들어가니 서대문의 지정 장소(후에 호주대사관이 됨)에서 인터뷰를 하자’는 통보였다.
내가 제출한 서류를 점검하고 영어실력을 확인해 보겠다는 내용 같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반신반의하면서 시도한 호주로의 모험이 어쩌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신감이 없어지기도 하고, 한편은 아직 젊으니까 한 번 덤벼보자는 오기가 발동하기도 하며 마음속이 복잡다단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호주 이민을 추진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교수생활에 잘 적응했다. 동료 교수 중에서 내 나이가 가장 적었지만, 그들과도 제법 잘 어울렸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특히 생각나는 분은 심정구 교수님이시다. 그분은 원래 시인이고 내 나이보다 십여 년이나 위였지만, 그와 상관없이 동료 교수로서 항상 함께 자리해 주시고, 때로는 소주잔도 기울이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던 분이다.
어느새 호주대사관과 약속한 날짜가 성큼 다가왔고, 나는 영사와의 인터뷰를 위해 대사관을 찾았다. 호주대사관은 서대문에 있었는데 한옥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영사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나 심장이 떨리던지 미리 준비한 신경안정제를 먹으며 성실히 면접을 잘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한 걸 보면 내 마음도 호주로 가고 싶었던 게 틀림없다.
이민 담당관이 면접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며, 이미 제출한 서류들을 하나씩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면접이 시작되었다. 질문하는 이민관의 영어발음은 미국인들과 대화할 때의 엑센트와는 다르게 느껴졌으나, 비교적 간단한 대답 정도는 대화가 가능했다. 그는 만약 내가 호주에 이민 가더라도 직장이 미리 마련되어 있을 테니 아주 다행이라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캔 모란 사장의 추천서가 그 모든 것을 뒷받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저한 백호주의를 고수하는 신비의 나라, 호주로 이민 가는 자체가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민관은 나한테, “자유당 존 고든 수상이 집권하면서 이제 호주에서는 더 이상 백호주의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호주연방정부의 달라진 이민정책과 호주에는 한국인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설명해 주었다. 중국인들은 일찍이 호주에 정착했으며. 실은 나를 면접하기 전에 이미 섬유기술자, 에어컨디션 기술자, 헬리콥터 조종사 등 몇 사람을 면접했다고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