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이민 허가 통지를 받고 (22...

호주대사관과의 이민 인터뷰

어느새 호주대사관과 약속한 날짜가 성큼 다가왔고, 나는 영사와의 인터뷰를 위해 대사관을 찾았다. 호주대사관은 서대문에 있었는데 한옥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영사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나 심장이 떨리던지 미리 준비한 신경안정제를 먹으며 성실히 면접을 잘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한 걸 보면 내 마음도 호주로 가고 싶었던 게 틀림없다.

이민 담당관이 면접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며, 이미 제출한 서류들을 하나씩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면접이 시작되었다. 질문하는 이민관의 영어발음은 미국인들과 대화할 때의 엑센트와는 다르게 느껴졌으나, 비교적 간단한 대답 정도는 대화가 가능했다.

그는 만약 내가 호주에 이민 가더라도 직장이 미리 마련되어 있을 테니 아주 다행이라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캔 모란 사장의 추천서가 그 모든 것을 뒷받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저한 백호주의를 고수하는 신비의 나라, 호주로 이민 가는 자체가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민관은 나한테, “자유당 존 고든 수상이 집권하면서 이제 호주에서는 더 이상 백호주의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호주연방정부의 달라진 이민정책과 호주에는 한국인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설명해 주었다. 중국인들은 일찍이 호주에 정착했으며. 실은 나를 면접하기 전에 이미 섬유기술자, 에어컨디션 기술자, 헬리콥터 조종사 등 몇 사람을 면접했다고도 했다.

인터뷰가 끝난 후, 이민관은 나를 지하로 데리고 가서 짧은(38mm) 호주 홍보 영상물을 보여주었다. 호주의 광활한 땅과 수목, 끝없이 펼쳐진 해안가, 수많은 양과 소들이 몰려다니는 시골 목축 풍경, 미국 서부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소를 몰고 다니는 카우보이들의 모습, 호주의 수도 캔버라에 있는 국회의사당, 시드니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시내 한복판으로 불쑥불쑥 들어오는 여객선과 수많은 요트 등은 내 마음을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이민관이 친절하게 나를 대해준 점도 내 마음을 끌었다. 경황이 없었지만, 그런대로 인터뷰를 잘 마쳤던 것 같다. 어쩐지 머나먼 호주로 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호주대사관 면접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내게 아내는 몹시도 궁금했던지 여러 가지를 물었다. 면접에는 잘 임했는지, 만약 호주로 가게 되면 앞으로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또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 그 비용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지나칠 정도로 많이 물었지만, 그때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우선 이민을 가라는 결정이 나지도 않았고, 비행기 항공권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더구나 호주에 이민 갈 때 돈을 지참한다는 것은 당시의 내 사정상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 그저 머리가 복잡하다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민허가와 여권 발급

그렇게 학교생활을 하며 한 학기를 마쳤을 때, 호주대사관에서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반신반의하며 조심스럽게 편지봉투를 뜯었다. “호주이민 허가가 났으니 호주입국 절차를 진행해도 좋다.”는 간단한 통보였다. 막상 이민 결정 통지서를 받고 보니, 그동안 몹시 당황스럽고 기쁘고 두렵기도 했던 순간들이 머리를 스쳐 갔다. 진로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또다시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 당시 한국은 남북대치 상황이 심각했다. 국적기 KNA(Korea National Airline) 납치사건도 있었고 무장간첩 남파사건이 수시로 발생했으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한국을 떠나려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과제는 여권을 만드는 일이었다. 일반인들은 웬만해선 여권을 취득하기가 어려웠다. 신원조회 할 때도 정보부, 방첩대, 경찰서, 내무부 등의 기관들을 거쳐야 했고, 그 과정에서 문제가 없어야 외무부에서 여권을 발급해 주었기 때문에 고급공무원, 비중 있는 사업가, 국가에서 인정하는 신분 외에는 여권을 소지할 수가 없었고, 여권은 우리 사회에서 그 사람의 신분을 입증하는 증명서와도 같았다.

▲ 60년대말은 북한과의 대립과 갈등이 심했고 극심한 반공이념으로 외국에 나가려면 정보부, 방첩대, 경찰서, 내무부 등의 기관들의 신원조회를 거쳐야 했다(경향신문 1989. 12. 13)

일간지 모서리에 대한항공기를 타고 입‧출국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실릴 만큼 해외여행이 철저히 관리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렵게 받아낸 호주입국 허가였기에 그 후에 부딪힐 일은 어찌 되건 나는 여권을 신청했다. 신원조회에서 내 친척, 처가 중에 어느 것 하나 걸릴 것이 없었지만 두어 달 조사 끝에 1969년 8월, 드디어 여권이 발급되었다.

여권! 막연한 환상을 품고 시작한 이민준비가 이제 현실이 되어버렸고, 출국 여부를 떠나 여권을 주머니에 넣으니 마치 내가 크게 신분상승 한 것처럼 여겨지고 우쭐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여권을 받은 후에도 호주로 떠나려는 마음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의 교수 신분이면 굳이 떠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호주입국 비자(VISA)는 받기로 했다. 비자 신청은 쉽게 받아들여졌고, 내 여권에 호주입국 비자 스탬프가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