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대사관에서 비자를 받던 날이었다.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한국직원(이름은 기억 안 남)이, 호주에서 사업하며 자주 한국과 호주를 왕래하는 M 씨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분은 시드니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그분의 이름, 주소, 사업체 등 자세한 사항을 잘 챙겼다.
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M 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한국인이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최소한의 위안은 되었다. 그 직원에게, 혹시 그분이 한국에 들어오면 나를 좀 만날 수 있게 주선해달라는 부탁도 해놓았다.
호주를 잊고 한국에서 살기로 마음을 정리
이제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다. 강의 준비, 학생 지도, 일과 후 동료 교수들과 어울리는 일, 교장 선생님 업무 보조, 방과 후 학생들과의 운동 등은 한국을 쉽게 떠날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떠나지 말까? 어느 날, 생각이 또 바뀌었다. 호주라는 곳을 아주 잊어버리고 한국에서 살기로 마음을 정하면서 새해가 시작되었다. 아내가 첫아이를 임신했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주었다.
호주이민을 포기한 채, 한 학기를 잘 끝내고 다시 봄 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호주대사관에서 또 편지가 왔다. 입국 비자 발급을 받은 지 1년 내에 호주로 입국하지 않으면 모든 이민 절차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호주이민을 포기하고 학교생활에 집중해보려던 생각이 다시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입국 비자 발급일로부터 일 년 이내라면 8월까지였다. 그러니까 봄 학기가 끝나면서 학교생활을 정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니면 호주이민을 완전히 포기하고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마지막 결단만 남은 상태였다. 외국으로 갈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야 한다는 그 당시의 사회 흐름상 차마 호주 이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국내에서도 석사학위 이상의 교육을 받아야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국내의 대학원에 진학할지, 외국의 대학원에 진학할지, 그 시기가 문제였다. 지금의 교수직은 석사 이상의 학위를 더 받지 않는 한 한계가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일단 호주에 가서 사정이 허락하는 한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다시 마음을 바꿔 호주이민을 가기로
또다시 상황이 바뀌었다. 이번 학기를 마치고 호주 이민 길에 오르기로 최종 결정을 했다. 이제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비행기 삯과 그곳에 가서 써야 할 비상금 마련이었다. 스윈들 드레슬러 회사의 캔 모란 사장에게 지금 호주에 들어가면 바로 일자리가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호주에 도착하면 캔 모란 사장의 회사 근처에 정착할 수 있는지, 아니면 어디에 정착해야 하는지를 알아보는 일이 급해졌다.
호주 이민을 포기한 후 캔 모란 사장과도 연락하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소식 전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면서, 호주 입국수속에 대한 것과 호주 입국 후에 해결해야 할 여러 궁금증을 적은 편지를 보냈다.
그때가 1970년 6월 중순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출발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 중 가장 큰 문제가 돈이었다. 그 시절에는 해외 이민자가 미화 300불 이상을 소지하면 불법으로 취급하여 외화 유출을 최우선 범죄로 다루고 있었다. 몰래 해외로 빼돌리는 미화 유출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경찰서에 잡혀가고 처벌받는 기사가 신문에 자주 올랐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불법 유출은 고사하고 미화 300불 지참금도 마련하기 어려웠고 거기다 여비까지 해결해야 했다.
힘겹게 이민자금을 마련
내 월급으로는 그만한 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동안 저축한 돈을 다 털어보아도 불가능했다. 또 처가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호주까지 가는 비행기 삯은 처가에서 마련해 주었고, 비상금 300불은 스스로 마련하여 결국 1970년 7월 30일로 출발 날짜를 잡았다.
이제 더 이상은 마음에 변화가 생길 수 없었다. 호주대사관 안내문에는 8월 이전에 떠나야 호주입국에 문제가 없다고 되어 있어서 그것을 참고하여 정한 날짜였다. 첫아이 출생 예정일이 9월 중순이었지만, 8월이 되면 입국 절차를 다시 밟아야 했기에 출산일 전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호주로 가는 비행기 코스는 영국항공(CPA, Cathy Pacific Airline)을 이용, 홍콩을 거쳐 호주항공(QANTAS)으로 시드니에 가는 코스와 일본항공(JAL)을 이용하여 동경을 거쳐 역시 호주항공으로 시드니에 가는 방법이 있었다. 어느 코스든 나는 초행이었기 때문에 값이 싼 홍콩-시드니 노선으로 예약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