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중순 어느 날, 호주대사관 한국직원이 학교로 전화를 걸어왔다. 얘기를 들어보니 호주 교포사업가 M 사장이었다. 무척 반가웠다. 호주대사관에서 한국직원으로부터 내 이민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며 인사 전화를 한 것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어떻게 안착할지 막막한 심정으로 남겨두었던 메시지를 M 사장이 받은 것이다.
호주 사업가 M사장과의 만남
나는 M 사장에게 만나 뵙기를 요청했다. 그분 역시 선뜻 시간을 내주어서 다음 날 시청역 골목길 옆의 지하다방에서 만났다. 그분의 명함에, 호주에 있는 ○○무역회사 사장(기억 안 남)으로 되어 있었다. M 사장은 경상도 사투리를 강하게 썼고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M 사장은 호주에 대한 설명과 함께, 자기는 양모 기술자이고, 과거에 콜롬보 계획이 있어 호주 빅토리아주 질롱(Geelong)이라는 곳에서 양털 분류 기술을 배운 적도 있다고 했다. 대구에 있는 제일모직 회사에 근무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 후 호주에 있는 섬유회사에서 일했는데, 지금은 시드니에 정착하여 무역회사를 차리고 한-호간 무역 관련 사업을 한다고 했다.
나는 참으로 좋은 사람을 만난 듯했다. 모든 것이 생소한 외국으로 이민 가는 마당에(물론, 그동안 Ken Morran 사장이 열심히 도와주긴 했지만, 그 무렵에는 소식이 끊긴 상황에서) 그런 분을 만난 것이 나로서는 천만다행이었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인도하여 주시는 거라고 믿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일어설 무렵, M 사장이 나보고 “이번에 호주 갈 때 돈은 얼마 정도 가지고 갈 거냐?”라고 물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흔들렸다. 그걸 왜 물어볼까? 나는 “나라에서 정해 놓은 미화 300불 외에는 가져가는 게 없다.”라고 대답하면서 순간적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달러로 바꿔주면서 뭔가 거래를 원하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돈을 얼마 가져가는지 굳이 물어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설사 M 사장의 의도가 전혀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나로서는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앞으로 저의 처와 아이까지 갈 때는 돈을 좀 더 가져갈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 혼자 출발하는 거니까 나라에서 정한 금액만 가지고 떠날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그 말은 어디까지나 M 사장과의 관계를 끊고 싶지 않아서 했을 뿐, 실제로 그 이상은 가지고 갈 돈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M 사장은 앞으로 자주 연락하자 하시고 헤어졌다. 그날, 귀가하면서 M 사장에 대한 궁금증이 더 깊어만 갔다. 혹시 앞으로 관계가 끊어지는 건 아닐까? 그러나 다음에 가족이 갈 때는 더 많은 돈을 가져갈 수 있다는 여유를 보였기 때문에 그리 쉽게 끊어지지는 않을 거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중 한 가지는 교장 선생님을 뵙고 학교 일을 정리하는 것이고, 그동안 정신적으로 많이 지원해준 조 대위와의 관계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어떤 통로를 만드는 것이었다. 먼저 교장 선생님을 조용히 찾아뵈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를 내세워 학교를 사직하겠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고, 힘들게 말문을 열었다. “학생을 지도하다 보니 제 실력이 역부족이라 외국에 나가서 공부를 좀 더 해서 다시 교단에 서겠습니다. 1년만 휴직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내 휴직서를 제출했다.
되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직서가 아닌 일단 휴직계를 내
정말 유학 아닌 유학을 가면서 말씀드리기가 무척 송구스러워서 일단은 피해 가는 길을 선택했다. 사실 돌아올 생각은 아니었지만, 1년간의 휴직을 요청한 것은 호주에 가보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 다시 돌아와 대학에 복귀하려는 저의도 깔려 있었다. 만일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경우에는 서면으로 휴직을 사직으로 바꿀 예정이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내 휴직계가 너무 늦게 제출된 것을 약간 불평하셨지만, 호주에 가서 더 연구하고 돌아오겠다는 것에 동의해 주셨다. 너무나 짧고도 아쉬운 교수 생활이었다. 재직기간이 짧아서 저축한 돈이 많지 않았다.
나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건설기술단의 조 대위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농담을 주고받고 신혼생활에 관한 얘기도 전해주던 그 친구가 육군본부로 전속되었다고 했다. 그때가 1969년 중반이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거의 완공되면 원대복귀 운운하긴 했었다.
한남동에 있는 그 친구의 부모님 댁으로 연락했더니, 부모님께서도 사시던 집을 팔고 어디론가 이사하신 후였다. 조 대위를 찾을 길이 막막했다. 그리고 출국 전에 더 이상의 시간 여유도 없었다. 인천에서 직장생활 하던 조 대위 부인한테도 연락해보니, 그분 역시 출산을 이유로 학교를 사직했다는 게 아닌가! 육군본부와의 접촉은 사실 민간인 신분으로는 어려웠다.
그렇게 조 대위는 지금까지도 만나볼 수 없는 친구가 되어버렸다. 조 대위 나름대로 개인 사정이 있었겠지만, 원대복귀 할 때 전화라도 좀 해주었으면 44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운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대복귀 후 정착하면 그 후에라도 연락이 올까 기다렸지만, 출국 직전까지도 소식이 끊긴 게 못내 아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