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삭인 아내는 우선 내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친정에서 지내기로 했다. 처가는 그런대로 재정이 어렵지 않았고, 호주에 나가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기대도 하고 계셨기 때문에 아내의 친정살이를 별말씀 없이 받아주셨다. 너무나 협조적이고 고맙게 해주셨다.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것 외에는 달리 할 게 없었다. 가까운 친구들 몇 명을 찾아가 호주에 이민 간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한결 같이 내 이민 결심을 정상이 아닌 짓이라고 핀잔 준 친구도 있었고, 그저 ‘잘해보라’며 격려해준 친구들도 있었다. 어떤 친구는 ‘왜 그 좋은 직장을 버리고 황량한 이민 길을 택하느냐’며 걱정을 많이 해주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다른 길은 없었다.
나는 M 사장에게 편지를 띄웠다. 편지에다 “1970년 8월 1일 아침 6시에 호주항공(QANTAS)으로 도착 예정이니, 공항에서 만나 뵙고 싶다.”라고 썼다. M 사장은 그렇게 하겠다고 짧은 답장을 보내왔다. 군에 다시 입대하는 기분으로 차츰 모든 것이 정리되고 있었다. 이제 한 달 정도만 지나면, 가고 싶기도 하고 가기 싫기도 하며 나를 그토록 고민하게 하였던 이민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백 년 가까이 백호주의를 지켜온 나라에서 정권이 바뀌었다고 그 나라 사람들의 생각조차 금방 바뀌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호주로의 이민을 꿈꾼 자체가 그야말로 무모한 덤벼가 아니었을까? 내 ‘덤벼 정신’이 시험대에 오른 아주 중요한 사건임이 틀림없었다.
이민지참금 미화 300불이 어렵게 준비되었다. ‘성공’이라는 이름을 걸고 아무 기약도 없이 떠나는 사위에게 온갖 정성을 쏟아 부으신 처가에 한없이 고맙고 미안했다. 다음 달 첫아이 출산일을 앞두고 무거운 몸으로 뒷바라지를 해주는 아내에게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토록 어려운 기회를 잡아 외국에 가게 되었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하시면서 용기를 주신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은 마치 내가 대성공이라도 보장받은 사람처럼 내게 거는 기대가 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는 외국으로 떠나는 자체를 일종의 성공으로 착각하던 때였으니까….
해외 나가던 자체를 성공으로 여기던 시절
드디어 출국일이 다가왔다. 1970년 7월 30일, 무척 더운 날씨였다. 가방과 보따리를 모두 챙겨 들고 김포공항으로 이동할 때, 여기저기서 온 환송객이 참 많았다. 사실 김포공항으로 환송하러 가는 그 자체도 특별하게 여기던 시절이었고, 나는 그 사람들에게 인사하느라 바빴다. 틀림없이 성공을 약속받은 사람처럼 대접받으니 나로서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김포공항의 제1청사를 수리, 보수하기 전이었으니까 그야말로 아주 작은 청사였다. 한여름이라, 천장에는 커다란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고, 출국 대합실에는 딱딱한 의자들이 즐비하게 놓여있었는데, 그 광경이 44여 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다.
그 당시 외국으로 출국하는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받은 교육은 방첩 교육, 여권 출국심사 교육, 출국카드 신고서 작성 교육, 외국 사람들에게 인사하기 교육, 비행기 갈아타기 교육 등 여러 가지 교육과정을 거쳐야 했다. 교육과정 중 특히 어려운 것은, 비행기를 갈아탈 때와 공항 내에서 이동수단을 이용해야 할 때 어쩔 수 없이 부딪혀야 하는 의사소통이었다. 난생처음 타보는 비행기인데다,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Transition) 과정은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영국계 홍콩 항공(CPA)으로 홍콩에서 내려 8시간 정도 기다렸다가 밤늦게 호주항공으로 갈아탈 일이 내게는 큰 숙제였다. 그런저런 걱정을 가슴에 안고 나는 출국 인사를 했다. 다시는 못 볼 것처럼 양가 부모님께서 울먹이며 건강을 당부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만삭의 몸으로 겨우 공항에 나온 아내의 표정은 그런대로 밝았다.
환송 차 공항에 나온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다시는 못 볼 듯이 아주 섭섭해 하는 표정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아내에게 “가능한 한 빨리 정착하여 호주로 오게 할 테니 몸 건강하게 출산 잘하라. 다시 군에 입대하는 마음으로 가는 것이니 내 각오를 믿어 달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내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실 테니 마음 든든히 먹고 가세요. 어렵든, 즐겁든, 어떤 환경에서도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세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내가 예상했던 대답은 아니었다. 나는 아내가 “몸 건강히 잘 챙겨 먹고, 여기 일은 염려 말아요.” 정도로 얘기할 줄 알았다.
어쨌든 그렇게 환송 인사가 끝나고 나는 출국심사대 문으로 들어가 여권은 왼손에, 가방 한 개는 오른손에 들고 출국 절차를 밟았다. 듣던 대로 심사가 엄격했다. 무장한 군인들이 출국심사대 근처에 서 있었고, 법무부 출입국 관리들도 여권 속의 사진과 실물을 대조하며 아주 세심하게 검사를 했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달러 유출에 관한 조사와 무기 소지 여부에 대한 검사였다. 나로서는 거리낄 게 없었다. 그 당시 사회 분위기는 조금만 잘못해도 출국이 취소될 수도 있었다. 출국심사대는 무사히 통과했고, 비행기 트랩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이동수단은 공항 내에 있는 버스였다. 버스를 타고 밖을 내다보니 여러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 식구들과 다른 환송객들이 섞인 그쪽을 향해 나는 힘껏 손을 흔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