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호주 땅을 밟다 (26화)

비행기 트랩으로 올라가 스튜어디스의 안내에 따라 내 좌석을 찾아 앉았다. 비행기 기종은 보잉 707이라고 했는데, 상상 외로 많은 사람이 탈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처음 받아보는 여승무원의 안내, 좌석벨트 조절, 여승무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 등이 신기했다. 이윽고 안내방송이 나왔는데, 영어 방송이 나온 후에 간단한 한국어 통역이 이어졌다.

CPA 항공 여승무원들의 태도는 놀랄 정도로 친절했고, 의자에 붙은 몇 개의 이상한 버튼을 작동하는 방법도 잘 알려 주었다. 역시 영어방송 내용은 바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승무원을 찾는 버튼과 음악 청취용 버튼은 금방 알아냈다. 좌석에 앉아 있노라니, 지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쳤다. 이제야말로 내 ‘덤벼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이제 비행기가 이륙하는 일만 남았다. 또 기내 방송이 나왔다. 아마도 비행기 이륙시간이 임박한 듯했다.

여승무원들이 양쪽 통로 끝에 서더니 비상시의 안전교육이 진행되었다. 모두 영어 방송이어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들의 몸짓이나 행동을 보며 알아들은 척했다. 안전띠 착용하고 승객들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때, 그 큰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을 내다볼 수는 없었으나, 비행기 이륙을 지켜보고 있을 얼굴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그중에는 임신 9개월의 아내도 있었는데, 내가 없는 동안 첫 출산을 해야 하니 많이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친정 부모가 옆에 계시니까 괜찮을 거라고 자위하는 동안 비행기는 서서히 고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귀가 꽉 막히더니 어느 순간 다시 뚫렸다. 이제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한참이나 지났을까?

기내 방송을 대충 들어보니 홍콩에 도착하는 시간, 그곳의 날씨, 도착 시의 주의사항, 세관 신고 등의 안내였다. 또 한참 지난 후 이번에는 맛있는 냄새가 퍼지더니 내 앞에도 식사가 배달되었다. 메뉴는 양식이었는데 맛있게 조리된 소고기, 음료수 등 여러 가지였다. 나는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닥치는 대로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기내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이동점포가 왔다 갔다 하는 등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열심히 살펴봐도 한국말 하는 사람은 없어

다시 방송이 나왔는데, 곧 홍콩에 도착한다는 내용 같았다. 막상 홍콩에 도착하자, 호주 시드니로 가는 호주항공으로 잘 찾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호주항공은 밤 8시에 출발하기 때문에 갈아타는 시간이 충분했지만, 초행길이라 약간 겁이 나긴 했다. 내 영어 수준이 어떻든 그때부터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만 했다. 두어 차례 공항 내의 안내소에 들렀다가 호주항공 탑승구에는 오후 늦게 도착했다. 이제는 안심이 됐다.

지금부터는 몇 시간이든 앉아있기만 하면 되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한국인인 듯한 사람은 없었다. 호주항공에 한국인이 타면, 시드니공항에서의 입국 절차와 시내 정보까지 얻고 싶었기에 열심히 살펴봐도 한국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중국어를 하는 사람들은 가끔 있고 거의 영어를 하는 백인들이었다.

6시간 정도 꼬박 의자에 앉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미지의 나라 호주로 가는 호주항공의 안내방송이 나오면서 승객들이 기내로 들어가기 위한 수속이 시작되었다. 한 줄로 섰던 승객들이 한 명씩 기내로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나는 가능한 마지막까지 한국인을 찾기 위해 뒷줄에 섰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호주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이번에는 기내 승무원이 거의 남자들이었다. 가끔 여승무원도 보이긴 했지만, 영국항공 항공기와는 대조적이었다. 대부분 남자승무원이라 왠지 딱딱한 분위기가 예상되었다. 음식과 음료 서빙을 비롯한 모든 느낌이 영국항공 여승무원들이 보여준 친절과는 많이 달랐다.

광할한 대지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

비행기가 이륙하고 밤새도록(10시간 정도) 비행 끝에 기내 방송이 또 나왔다. 창밖을 보니 새벽 여명이 밝아오며 엄청나게 넓은 산악 풍경이 내 시야에 들어왔고, 아침이 다가올수록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대지가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내가 살아야 할 땅인데 좋은 땅일지, 많은 고생이 기다리고 있는 황무지일지, 앞으로 그 땅에서 펼쳐질 새로운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약 1시간 후, 시드니국제공항(Kingsford Smith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한다는 기내방송이 또 나왔고, 낯선 호주 땅에서 ‘덤벼’ 현실이 바로 눈앞에 와있었다. 나는 전율하며 다짐했다. ‘이제 나는 호주에 덤벼들어 생존하는 길밖에 없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백인들에게 덤벼보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라고. 사력을 다하여 빨리 호주에 정착하고, 아내와 아이를 호주로 불러야 했다.

이윽고 시드니에 도착했다. 나를 반가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내려야만 했고, 짐도 찾고 입국 수속도 했다. 호주 입국 수속 카드에는 깨알만 한 글씨로 복잡한 사항들을 많이 기재하게 되어 있었다. 모두 기억할 순 없지만, 많은 액수의 미화 반입, 음식물 반입, 주류 반입, 무기류 반입, 질병 등에 관해 적혀 있었다.

입국심사대의 심사원은 백인 남자였는데, 한참 동안 여권을 들여다보며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뭐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잔뜩 긴장도 했거니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미국인들과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했건만, 심사원이 물어오는 영어발음과 짧게 내뱉는 어투 하며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질문들이 이어져서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아마 동양인인데다 한국인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 같았다. 한참 서 있었더니 결국 꽝! 하고 입국도장을 찍어주었다. 입국 승인이 된 것이다.

▲ 최근의 시드니국제공항(Kingsford Smith International Airport)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