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직원에게 내 항공권을 보여주며 짐에 대해 조심스레 묻자, 00번 수화물 창구에 가라고 하여 급히 갔더니 내 짐만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게 아닌가? 어쨌든 다행이었다. 짐을 챙겨 들고 짐 조사하는 데스크로 갔다. 입국 세관 기록카드와 이민 짐 가방을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더 이상의 조사 없이 밖으로 나갈 수가 있었다.
밖으로 나가기까지 좀 긴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혹시 M 사장이 없으면 큰일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M 사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제 M 사장을 만났으니 적어도 시드니에서 길 잃은 강아지 신세는 면할 수 있고 숙박업소 찾는 어려움도 없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시드니 국제공항은 한국의 김포공항보다 몇 배로 넓었다. M 사장의 차가 주차장에 있었다. 한국에서는 자가용을 상상도 못 했는데 개인이 자가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의아했다. 어디로 가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M 사장의 차를 타니 피곤하기보다는 캔 모란에게 전화하는 일이 더 시급하게 느껴졌다. 영어회화 중에서도 영어로 전화통화 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믿고 온 캔 모란과의 연락두절
M 사장에게 캔 모란 이야기를 하면서 그분께 전화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시내전화로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캔 모란이 있는 곳은 시드니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30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는 울렁공(Wollongong)이었다. 말하자면, 시외전화를 걸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도 M 사장은 어디선가 잠깐 내려 공중전화 부스로 가더니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M 사장에게서 통화 결과를 듣고 나는 거의 쓰러질 뻔했다. 캔 모란 사장은 약 6개월 전에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게 아닌가? 그동안 나하고 연락이 끊긴 이유도 그가 퇴직했기 때문으로 그제야 이해되었다.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숙소는 아직 정하지도 못한 상태였고 가슴이 답답했다. 한국인의 정서라면 혹시라도 그날 밤은 M 사장의 집에서 묵으라고 배려해주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도 해보았다. 그런저런 생각 속에서 M 사장한테 내 숙소를 물으니, 아직 정해놓은 곳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제야 여기저기 전화로 알아보는 것이었다. 하기야 내가 호주에 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미리 숙소를 예약하기는 어려웠을 것이었다.
늦은 저녁 내가 묵을 숙소로 찾아간 곳은, 시드니 중앙역(Central Station) 바로 옆 골목의 아주 저렴한 쿠란다 게스트 하우스(Ku-Ran-Da Guest House)라는 여관이었다. 일주일 숙박비가 12$이니까 내가 가져간 돈으로 약 2개월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여관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6시경. 짐을 풀자마자 생전 처음 코피가 쏟아졌다. 호주라는 낯선 나라에 이민 오는 문제로 극도의 긴장 속에서 지낸데다, 캔 모란과의 전화 불통에 충격을 받아 거의 쓰러질 듯 마음이 흔들린 결과였다.
일단 그 여관에 짐을 풀고 잠시 쉬고 있는데, M 사장에게 그 여관을 미리 소개해 주었다는 한국사람(치과의사)이 들어왔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 치과의사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치과병원을 운영하다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이곳으로 이민 와서 정착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의 가족은 한국에 남아 있었는데, 거기서 어느 정도 정착이 되면 부를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여관에서는 아침만 제공하고 점심과 저녁은 내가 해결해야 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밖에 나가보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내가 올 때, 한국은 한여름이었는데 호주는 한겨울이었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겨울 날씨에 대비한 장비라고는 가벼운 점퍼 정도였다. 가까운 구멍가게를 찾아 메뉴를 보니 핫도그와 샌드위치가 전부였고, 비교적 값이 싼 샌드위치를 한 개 샀다. 가격은 아마 6센트 정도였던 것 같다.
난생처음 맛보는 샌드위치였다. 식성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나도, 샌드위치는 쉽게 먹히질 않았다. 처음 맡아보는 이상야릇한 냄새와 모래알을 씹는 듯 한 느낌, 종이에 둘둘 말은 모양 등 모두 생소하고 기분 좋은 식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랴. 샌드위치 한 쪽과 물 한 모금을 번갈아 먹으며 그날 저녁 식사를 그렇게 때웠다. 쏟아지던 코피는 다행히도 멈추었다.
이튿날이었다. 이제 직장을 구하러 나서야 했다. 그것만이 내가 살 길이었다. 소통이 되든, 안 되든 내 영어실력으로 호주에 덤벼보기로 비장한 결심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호주에서는 직장을 잃었거나 새로 이민 온 사람들에게 국가에서 임시로 지급하는 수당이 있어서 그렇게 발버둥을 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정보를 전혀 접하지 못한 나로서는 오직 직장을 구하는 것만이 내가 살 길이라고 생각하여 덤벼 정신으로 무장했던 것이다.
우선, 가장 먼저 할 수 있었던 일은 묵고 있던 여관에서 가장 가까운 직업소개소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지역 전화번호부 중 옐로 페이지(Yellow Page)는 상업 편이고, 사람을 찾을 때는 화이트 페이지(White Page)를 참고하면 되었다. 옐로 페이지에서 직업을 소개해주는 곳 중, 여관과 가까운 곳은 무조건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동시에 가장 큰 일간지로 알려진 ‘시드니 모닝 헤럴드(Sydney Morning Herald)’에 게재된 구직난을 샅샅이 뒤지는 일이었다. 내 전공과 직장경력에 맞는 요업(Ceramics) 관련 분야는 전부 덤벼보기로 했다. 요업이란, 전통적인 도자기와 더 나아가 고도의 기술공학에 해당하는, 정밀요업도 해당하는 분야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