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박하던 여관에서 아침 식사가 제공되었다. 무슨 음식을 주문할 정도의 식당은 아니고, 여관에서 정한 메뉴를 식당 아주머니가 만들어주는 정도였다. 이튿날, 넓은 접시에 베이컨과 달걀 넣은 식빵을, 그리고 커피와 과일도 조금 주었다. 그 요리를 우리식으로는 ‘베이컨 앤드 에그’라고 부르지만, 식당 아주머니는 ‘백앤엑’이라고 발음했다. 그렇게 내지르는 소리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 궁금했지만, 다시 물어볼 틈이 없어 돌아서 버렸다.
호주식 영어에 의사소통부터 벽에 부닥쳐
그러다가 한국인 치과의사(Dr. Chung)에게 물어보았다. 치과의사 설명에 의하면, 호주인들의 발음은 미국식도 영국식도 아닌 호주식이라서 잘 알아듣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투데이(Today)를 투다이로, 베이컨(Bacon)을 백콘으로, 애플(Apple)을 아플로 발음한다는 것이다. 참 독특한 발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의 영어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직장을 구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식당 아주머니와 그런 일로 왈가왈부할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 여관은 시드니 시내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에 걸어서 시내에 있는 직업소개소마다 찾아다니며 내 이력서를 남기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래 봤자 서너 곳에 불과했지만….
직업소개소, 신문의 구인광고에 매달려
시드니 모닝 헤럴드의 구인난 광고는, 전화해서 영어로 대화하는 것은 너무나 서툴렀기 때문에 가능한 직업소개소를 방문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사실, 신문에 광고된 직장에 관심이 있다 해도 전화문의보다는 직접 찾아가서 나를 설명하는 게 오히려 편한 상태였다. 그래도 기차나 택시로 움직여야 하니 하루에 한두 군데 밖에는 면접할 수가 없었다. 직업소개소에다 내 연락처로 여관 전화번호를 적어놓았고, 나는 신문 구인광고를 오려서 가방에 넣고 회사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버스로, 기차로, 택시로, 걸어서 온종일 돌아다니다가 여관으로 들어가는데, 길 입구에서 오렌지를 가득 실은 이동식 점포가 할인 판매를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먹어볼 수 없던 오렌지였다. 그 당시 한국에서 오렌지를 먹어볼 수 있는 사람은 100명 중 몇 사람에 불과할 정도로 귀하고도 귀한 과일이었다. 여관에서 아침 식사 시, 오렌지도 몇 조각씩 주기도 했지만, 이동 점포에서 할인하는 그 오렌지가 너무나 먹고 싶었다.
사실, 아침 식사를 제외한 나머지 두 끼는 나 스스로 해결해야 했기에 식사비와 교통비 외에는 다른 어떤 지출도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그런 처지에서 비싼 오렌지를 간식으로 사 먹는다는 것은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여관을 드나들 때마다 이동 점포에 맛있는 오렌지와 기타 과일들이 진열된 것을 보았지만, 나한테는 그저 눈요기에 불과했다.
하루는 그 가게에서 파격 할인 중이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으나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가게 앞으로 되돌아가서 일단 먹고 보자는 배짱으로 20센트를 불쑥 내밀었다(그 무렵, 시드니 모닝 헤럴드 신문 한 장 값이 2센트였음).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동가게 아저씨가 오렌지를 한 보따리나 주는 것이었다. 10센트 어치만 살 수도 있었지만, 기왕 산 것이니 다 먹어보자는 생각으로 양손에 들고 여관에 들어가 치과의사 방으로 갔다.
그러나 치과의사는 아직 들어오지 않은 상태여서 내 방으로 가져가 순식간에 다 먹어버렸다. 오렌지로 배를 한가득 채운 것이다. 너무 많이 먹어서 혹시라도 배탈이 날까 봐 걱정했지만, 아무 이상이 없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날 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면접을 봤지만 번번이 실패
다음 날 아침 일찍 직업소개소에서 연락이 왔다. 시드니에서 기차로 약 1시간 정도 걸리는 리버풀(Liverpool)이라는 곳의 미국계 유리공장에서 면접하겠다는 소식이었다. 면접시간이 오후 2시여서 나는 서둘러 준비하여 그 회사로 찾아갔다.
그 공장은 아주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면접할 때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내고 내가 답변을 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내가 나를 먼저 소개하는 방식을 택했다. 거기까지는 쉽게 소통이 되었더라도 내 소개가 끝난 후 그쪽에서 질문할 때가 항상 문제였다. 근본적으로 내 영어실력이 부족한 게 원인이겠지만 호주인들의 질문을 정확히 이해 못 하는 게 큰 애로였다.
호주인들 특유의 독특한 발음과 억양이 걸림돌이었고, 질문 내용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어 정확한 답변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서너 차례 모두 취업에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리공장이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최후 통보는 ‘쏘리(Sorry)’였다. 쏘리라는 답변을 직접 듣거나 통보장에 적힌 이 단어를 볼 때마다, 그들의 잘못이 아닌데도 나를 고용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하다’ 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도 그렇게 허탕을 치고 말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마음은 초조해졌다. 장인이 한국에서 미국 선교부 건축 일을 하시는 터라, 한국에서 활동하는 미국과 호주 선교사 몇 분을 잘 알고 계셨다. 내가 호주로 출발하기 전에도 소개받은 사람이 있었는데, 원성희(Miss Dorothy Waston, 후에 연세대학교 언드우드 이사장과 결혼했음) 씨였다. 그분은 원래 호주의 동남부인 빅토리아주 질롱에서 여학교를 마치고 처녀 몸으로 한국에 와서 주한 호주 선교사 자격으로 마산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호주로 떠나기 직전에 서울에서 만났었다.
그때 원성희 씨가 나보고 ‘호주에 가면 만나보라’며 알려준 이름들이 있었다. 호주 장로교회 총회본부 서덕기(Stuckey) 목사님, 시드니대학교 국제기숙사 사감 선생인 미스 멕카튠(Miss McCarteon), 짐 크로프트(Jim Croft) 목사님 등 세 분이었다. 먼저 세 분 중에서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장로교 총회의 서덕기 목사님을 찾아갔다. 연세가 지긋하신 서 목사님께서 한국말로 친절하게 나를 맞아주셨지만, 직업을 찾고 있던 내게는 큰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