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에 찾아뵌 분은 미스 멕카튠이었다. 그분도 시내 쪽에 계셔서 쉽게 만나볼 수 있었는데, 그분 역시 매우 친절히 맞아주시며 시드니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도 한국분이라고 했다. 내 취업에는 별 도움을 주시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많이 위로해 주셨다.
마지막으로 크로프트 목사님(한국명: 구의두)을 찾아갔다. 구 목사님은 한국에서 귀국한 후부터 더 이상 목회는 안 하시고 고등학교 화학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그분도 마산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하신 터라, 한국말을 조금씩 섞어서 대화하실 수 있었다.
구 목사님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직접 여관으로 전화하셔서 직장도 소개하셨지만, 내 전공 분야와 달라서인지 잘 성사되지 않았다. 내가 서툴게 전화하거나 편지를 보내거나 해도 안내를 잘해주셨고, 주말에는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대접도 해주셨다.
그분 슬하에는 아들만 셋이 있었는데, 12살, 10살, 5살로 집이 떠나갈 정도로 시끄럽게 뛰어다녔다. 한 번은 큰 애가 말썽을 부리니까 구 목사님께서 아이에게 아주 심하게 매질하는 것을 보고 놀라며 ‘서양 사람들도 이렇게 아이들을 훈육하는구나!’ 그때 알게 되었다.
적극적인 직업소개소의 추천
그렇게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 직업소개소로부터 연락이 왔다. 00월 00일 00시에 소개소로 오면 자기들이 먼저 면접을 보겠다고 했다. 다행히 면접 장소는 시내에 있었기 때문에 날짜에 맞춰 쉽사리 찾아갔다.
아주 젊은 사람이 나를 면접했는데, 대화하는 자세가 그동안의 소개소들 중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섬세했다. 그 사람이 ‘취직이 가능하다’며 추천한 곳은 시드니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프랜치스 포레스트(French's Forest) 지역에 있는 부스 벽돌공장(Booth Bricks)이라는 회사였다. 벽돌 제조회사인 듯했고, 그 정도의 제조 회사라면 내가 일을 함에 있어 기술적으로 큰 부담이 안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개소에서는, 그들의 추천으로 내가 취직이 될 경우 나의 일주일치 주급(당시, 주당 60$ 정도)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나로서는 취직만 된다면 주급을 가져가는 것쯤이야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부스 벽돌공장 회사에서 하는 일은 시험실에서 품질관리 시험, 보고서 작성 정도의 업무라고 했다. 일주일 동안 방 한 칸 대여 비용이 약 10～12$ 정도였으니까 내게 큰돈임이 틀림없었다. 면접이 끝나자마자 직업소개소 직원은 그 자리에서 바로 부스 벽돌공장 회사 책임자와 통화를 했고, 그 회사 면접 일자가 정해지는 대로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호주에 도착한 지 3주쯤 되던 때였으니까, 만약 그 회사에 취직된다면 한국에서 가지고 간 미화 300$가 부족할 것 같지는 않았다.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취직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이유는, 그 회사에 취직되면 소개소에서 주급을 가져가도 좋다는 서류에 서명을 했고, 나를 면접하기 전 이미 그 회사와 소개소 간에 충분한 대화가 있었으리라 추측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다른 두어 회사에서도 거듭 면접을 보며 긴장하고 있을 때, 부스 벽돌공장 회사와의 면접날짜가 정해졌다는 연락이 왔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리다가 시간에 맞춰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그 회사에 잘 찾아갔다. 회사 정문에 있는 사무실 입구에서 여비서가 나를 면접 장소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 여비서는 나이가 50여 세로 보였고 아주 고운 여성이었다.
그녀가 나한테 먼저 자기 이름이 조안 마빈(Joane Marvin)이라고 소개했고, 나는 한국에서 흔히 쓰는 ○○ 씨라는 호칭으로, 한국식 영어로 나를 소개했다. “My name is Mr Nam Woong Lim.”이라고 하자 그 여비서가 크게 웃으며 “Oh, Nam(오우, 남!)”이라고 대답하는 게 아닌가? 내 이름 세 글자를 한 글자로 줄이면서 Mr.까지 빼버리는 게 아닌가? 순간적으로 내 영어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부끄러운 생각이 앞섰다.
한참을 기다렸더니 시험실 책임자가 나와서 내게 악수하며 말을 건넸다. “플리스 투 미트 유, 보리스(Please to meet you, Boris : 만나서 반갑다. 나는 보리스야).”라고 아주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my name is…’는 아예 빼버리고 다짜고짜 ‘보리스’라며 자기 이름을 퉁명스럽게 밝혔다. 여비서에게 한 것처럼 내 소개를 하면 또 실수가 될 것 같아서 이번에는 “My name is Nam.”이라고만 소개했다.
실험실 대화 책임자와 대화가 잘 돼
면접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늘 해온 방식대로 나를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소개했다. 시험실 책임자 보리스의 정식 이름은 미스터 보리스 럭커스키(Mr. Boris Luckersky)였다(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사람은 러시아인으로 오래전에 호주에 이민 옴). 시험실장과의 영어 대화는 큰 부담이 없었고, 그런대로 대화가 잘 이어졌다. 호주 태생도 아니고 아직 러시아식 영어발음을 쓰고 있어서 전형적인 호주식 발음보다는 내가 이해하기가 훨씬 쉬웠다(알고 보니, Boris는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서 살다가 호주에 다시 정착했음).
보리스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그의 퇴근 시간이 되었다. 그는 자기 차에 나를 태워 퇴근길에 중간 기차역에서 내려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면접결과는 내일 결정해서 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보리스의 차를 타고 그가 내려줄 기차역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함께 이동했다. 자동차로 20여 분이나 달렸을까? 나를 내려준 곳은 스트라스필드(Strath Field)라는 기차역이었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제법 넓은 기차역이었고 사람들의 왕래도 빈번한 곳이었다. 지도를 펼쳐 자세히 보니, 그 역에서 중앙역까지 그리 먼 것 같지는 않았다. 기차를 타고 여러 가지 생각에 젖다 보니 어느덧 시드니 중앙역에 도착했다.
나는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다. 만삭인 아내는 물론 양가 부모님께서 내 앞날을 위해 기도하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날은 더욱더 간절히 기도했다. 그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