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시드니로 간 지 4주째 되던 금요일 오전이었다. 막 직장을 구하러 나가려던 참에 어떤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You? Nam?” / “Yes!” 나는 순간적으로 그 여비서의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얼른 대답했다. 그녀가 “This is Joane.”이라고 또렷하게 발음했다.
‘Monday, Next week! You could start your job! Congratulations!”
눈물겹도록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전화로 긴 대화는 할 수 없고 그저 ‘Thank You!’만 연발했다. 전화를 끊은 즉시 할 일이 생겼다. 자취방을 구하는 문제였다. 회사 근처나 회사 출근이 가능한 북쪽 지역 어딘가에 당장 자취방을 구해야 했다.
나는 바로 시드니 모닝 헤럴드(Sydney Morning Herald) 신문을 샀다. 이번에는 구직난이 아니라 자취방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시드니 지도를 펼쳐놓고 부동산 광고 중에서 자취방 대여란을 샅샅이 훑었다. 우선 출퇴근이 가능하고, 대여료가 아주 저렴해야 하는 두 가지 조건만 맞으면 되었다.
직장생활을 위한 자취방을 구하며 만반의 준비
시드니 북쪽은 집값도 비싸고 대여료도 비싸기로 소문난 지역이라고 한 여관집 매니저의 말이 기분 나쁘게 내 귀를 스쳤다. 수소문 끝에 대여료 주당 12불, 버스는 한 번만 타고, 도보로 약 10여 분 거리에 위치한 자취방을 찾아냈다. 자취방이 있는 지역 이름은 로즈빌(Roseville)이었다. 여관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아주 조용하고 좋은 동네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자취방을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집주인과도 전화통화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계약을 하기 위해 나는 곧장 그곳으로 출발했다.
그 집 여주인은 프랑스에서 이민 온 키가 작은 노인이었다. 그분 역시 영어가 서툴렀다. 내가 얻으려던 자취방과 여주인의 방은 같은 지붕 아래지만 분리되어 있었다. 자취방 3개 중 2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 개를 내가 쓰게 된 것이다. 부엌은 세 사람 공용이었고 냉장고와 가스, 오븐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며 목욕시설도 역시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대여료는 매달 선급 계약금에다 일주일마다 선급하는 조건이었다. 한국의 월세 개념과는 전혀 달랐고 전세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웬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
모든 계약을 끝내고 그날 밤 자취방으로 짐을 옮기기로 했다. 그 지역에 있는 로즈빌 기차역에서 시드니 중앙역까지는 불과 7～8 정거장 정도여서 멀지는 않았다. 나는 짐을 모두 챙겨서 저녁에 택시를 탔다. 사실 여관에서 택시로 로즈빌까지 가려면 시내 중심부를 통과하여 시드니 하버 브리지(Sydney Harbour bridge)를 건너야 했다. 일반적으로 그 두 곳을 지나가려면 수차례 신호등 대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내가 탄 택시가 신호등 앞에 가기만 하면 푸른 신호등으로 바뀌는 바람에 빨강 신호등 앞에서 멈춘 것은 몇 개 정도에 불과했다. 왠지 내게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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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드니 하버 브리지(Sydney Harbour brid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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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방에 도착해서 짐을 푼 시간은 저녁 8시경이었다. ‘여기가 앞으로 내가 살 곳이다.’ 생각하니 마음이 흐뭇해졌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무언가 큰일을 성취한 듯 마음이 홀가분했다. 짐이라야 별로 없었지만, 이것저것 정리하고 나니 배가 고팠다. 그런데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밤 9시가 다 된 시간에 한국처럼 밖에 나가면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지리도 모르니까 할 수 없이 그날은 그대로 굶고 잔 기억이 새롭다.
전날 밤에 잠은 잘 잤는데도, 다음 날 아침부터 피로감이 몰려오고 배도 고팠다. 이튿날이 일요일이어서 일단 교회는 가야 했다. 혹시 뭐 먹을 것이 있을까 하고 부엌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바로 옆방에 사시는 아저씨가 잠옷 바람으로 나오셨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곳 사정도 알아보고 교회와 가게 위치도 물어보고 싶어서 함께 커피 한 잔 마시자고 제의했다.
잊을 수 없는 커피와 비스킷
사실 나한테는 커피도 없었는데 그분이 기꺼이 커피를 끓여 비스킷까지 얹어 주시는 게 아닌가? 아! 그때 먹은 커피와 비스킷의 맛을 평생 잊을 수 없다. 지난밤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잔데다, 배가 고플 대로 고팠던 그 시간에 맡은 그 커피 향은 이 세상 그 어떤 향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았고 친절을 베풀어주신 그 아저씨가 무척 고마웠다. 그 아저씨는 호주인이고 독신이었다. 나한테 교회와 가게, 버스정류장, 쇼핑센터가 있는 곳(Chastswood)의 위치를 잘 설명해 주셨다.
나는 또 서둘렀다. 교회에 가서 오전 10시 예배를 드린 후, 쇼핑센터에 들러 먹거리를 좀 구입할 생각이었다. 교회까지는 걸어서 약 20분 정도 걸렸다. 그 교회의 교인이라야 20~30명 정도였는데 거의 노인들만 계셔서 좀 이상했다. 한국처럼 찬양대, 주일학교, 낮 예배 등이 있을 줄 알았는데 교회 분위기가 찬바람만 도는 듯했다. 물론, 목사님 설교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평화롭고 서울에 있는 가족들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특히, 첫아이 출산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을 믿었다.
예배가 끝난 후 목사님(이름 기억 안 남)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데, 당번 할머니께서 커피와 비스킷이 준비되었다며 친교장소로 나를 안내하셔서 그곳으로 가보았다. 나를 안내하신 분도, 나한테 말을 건넨 교인들도 모두 노인들이었다. 나이 젊은 교인들은 만나기 어려웠다. 그들과의 대화는 주로 날씨와 어디에서 왔느냐는 인사말 정도였다. 200여 년을 지켜온 정통 백인사회에 동양인인 한국 사람이 불쑥 나타난 것을 그들은 무척 신기해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잘 몰랐으며, 한국전쟁과 관련된 역사만 약간 아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게 일요일 예배를 마치고 쇼핑이 가능한 지역으로 나가보았지만, 일요일은 대부분의 가게가 휴무였고, 과일가게와 코너가게에서 최소한의 식료품 정도만 살 수 있었다. 가장 급한 것이 밥을 해먹을 수 있는 냄비 몇 개, 쌀, 빵, 배추, 소금, 커피 등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