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날은 식빵, 커피, 설탕만 살 수 있어서 다음 날부터가 걱정이었다. 그날 사두지 않으면 일주일 내내 사기 어려울 것 같아, 나는 곧바로 시드니 중앙역 앞에 있는 일본가게로 향했다. 여관생활 할 때 일본가게는 항상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가게는 다른 가게보다 물건 값이 훨씬 비싼 게 문제였다. 나는 중앙역에서 내려 일본가게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내가 사고 싶었던 냄비와 쌀도 있었고, 그 외 일본식 김치통조림 일본식 단무지 등 몇 가지를 비싸게 구입했다.
그 모든 과정이 낯설었으나, 대학생활 4년 동안 일곱 번을 이사하면서 자취생활하며 나름대로 터득한 요령이 있었기에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쌀에 돌도 없고 씻을 필요도 없이 깨끗했다. 쌀을 냄비에 안치고 가스 불을 아주 낮게 조절하여 외국에서 처음으로 밥을 지었다. 일본식 다꾸앙(단무지)과 김치 통조림에 약간의 소금을 뿌리고, 거기에다 서울에서 가져온 고춧가루를 넣어서 내 식의 김치를 만들었다.
그날 저녁에 손수 지어먹은 밥과 그 김치 맛은 평생 잊지 못할 최고의 저녁 식사였다. 내친김에 누룽지까지 만들어 마시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월요일 아침 일찍부터 첫 출근을 서둘렀다. 초행길이었기 때문이다. 미리 확인해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는데, 일반 공용버스가 아니라 개인회사에서 운영하는 코치 라인 버스(Coach Line Bus)였다. 요금이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대로 상쾌했다.
회사 정문에 들어서니 여비서가 안내해 주어
버스가 가는 방향은 시드니에서도 가장 조용하고 숲이 우거져 도시 같지 않은 도시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북적대고 떠들썩한 한국의 도시들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그림처럼 예쁜 주택들이 나란히 있었고, 거무스름한 아스팔트 색깔이 한국의 것보다 좋아 보였다. 모든 것이 부자나라다웠다.
약 20여 분을 달리자, 버스가 포레스트빌(Forestville)이라는 쇼핑센터 버스정류장에 멈추어 섰다. 미리 익힌 대로, 거기서 내려 회사까지 10분 동안 걸었다. 회사 정문에 들어서니 입구에서 여비서가 나를 알아보고는 내가 처음 면접했던 보리스(Boris)의 방으로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보리스는 공장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공장장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러시아인의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한국 같으면 주말을 잘 보냈는지, 이사는 잘했는지, 어떻게 출근을 했는지 등을 물어볼 만도 한데 그런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는 전화 수화기를 들더니 실험실 책임자를 호출했다. 실험실 책임자는 미스터 데이비드 사머빌(Mr. David Somerville)라는 영국인이었고,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보리스의 말에 의하면, 데이비드(David)가 일주일 내로 퇴직하게 되었으니 일주일 동안 모든 업무를 인계받으라는 것이었다. 우리 세 사람 사이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나는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잠시 후, 데이비드가 나를 실험실로 데리고 갔다. 실험실에 대한 내 첫인상은 대형연구소 개념의 연구실험실이 아니고,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품질테스트 하기 위해 간단한 실험도구들이 잘 정돈된 공간이었다.
부여받은 실험실 업무
데이비드는 영국식 영어발음으로, 내가 매일 해야 하는 시험과 현장에 가서 조사하는 일, 보고서 작성하는 일 등 몇 가지를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앞으로 내가 실험실 업무를 하게 될 것 같았다. 다행히 인천 공장 실험실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서 매일 작동해야 하는 시험기들 다루는 일들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며칠 후 데이비드는 회사를 떠났고, 그 뒤를 이어 나는 실험실 업무를 차질 없이 수행했다.
역시 일상 업무에서 가장 큰 애로사항은 공장장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점과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주로, 레바논, 이탈리아, 그리스 등에서 호주에 이민 온 사람들)이 검은 머리 동양인을 업신여기고 무례하게 대할 때 잘 참는 일이었다.
진작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했지만, 막상 그곳에서 먹고 살려니 영어실력이 왜 그리도 오르지를 않는지, 내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긴, 한국을 떠난 지 몇 달도 안 되던 때였으니 언어 문제가 당장 해결될 일은 아니었지만, 오래 산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지도 알 수는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회사 여비서는 나한테 마치 친어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녀는 내가 살던 로즈빌의 바로 옆 동네인 킬라라(Killara)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가 사는 동네는 상류층들이 거주하는, 시드니에서도 가장 부유한 곳이었다. 출‧퇴근 시, 가끔 나를 자기 차에 태워 내 자취집까지 데려다 주기도 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자기들도 영국에서 호주에 처음 이민 왔을 때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어려운 대화 등 애로사항을 여비서가 챙겨주어
그러나 그녀는 영국 사람이었다. 내가 당장 겪는 어려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첫째 영어문제가 전혀 없지 않은가? 또 호주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영국인 후손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정착에 어려움이 많았다면, 동양인에다 영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내 처지는 어떠하겠는가. 물론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로 여겨지기는 했다.
그녀의 친절과 자상한 보살핌에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움을 느꼈다. 카메라를 빌려주면서 주말에 사진을 찍어 서울로 보내라고 배려하고, 자기 집에 초대하여 맛있는 저녁도 대접해주고, 내가 회사에서 말 못할 사정이 생기면 실험실에 쫓아와 통역해준 것 하며, 호주에 정착하기 위해 알아야 할 정보 제공 등등 정말 친어머니 역할을 해주었다.
나는 회사에 출근하면, 먼저 공장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제품의 표본을 뽑은 후, 곧바로 품질검사와 관련된 시험들을 하고, 오후에는 품질검사 결과에 대한 작업일지 정리와 간단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공장장에게 제출하여 결제를 받았다. 그런 후, 다음날 작업에 대한 안내를 받고 새 원료에 대한 평가도 했다. 점심때가 되면 회사 밖으로 나가서 파란 하늘을 보며 맑은 공기도 쐬고, 샌드위치나 기타 먹을거리도 사고, 회사에 배달된 기술 잡지나 관련 서적들을 틈틈이 읽으며 자료를 조사하는 것도 일과 중의 하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