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질고 참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들 이름을 지어
그럭저럭 1970년도를 보내고 이듬해에 서울에서 편지가 왔다. 아이는 잘 크고 친정에서도 너무나 잘 보살펴주고 있으니 집 걱정은 말고 내 건강을 잘 살피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첫아이 낳은 직후에 아이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 물어왔을 때 즉시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런 나 자신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너, 아빠 된 거 맞아? 준비됐어? 아이 키울 자신 있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주당 60여 불 받아서 자취방 대여료 지급하고 기타 지출을 제하면 먹고 살기도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세상에 태어난 아기의 이름은 잘 지어주어야 할 것 아닌가? 인웅(仁雄)이? 인(仁)자는 엄마 이름을 딴 한자어고, 웅(雄)은 내 이름에서 한 글자 붙일까? 그러나 남웅, 인웅은 형제 같은 느낌이 들어 일단 취소하고 아버지께 여쭈어보라고 다시 서울로 연락했다. 아버지 역시 손주 이름 짓는 게 부담스러우셨는지 아빠인 나한테 지어보라고 하셨단다.
오래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지은 이름이 ‘현진(賢眞)’이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어질고 참되길 바라, 어질 현과 참진, 즉 현명하고 참된 사람이 되라는 소망을 담아서였다. 내 아들의 이름이 그렇게 임현진(林賢眞)으로 정해졌다. 현진이의 사진을 보니, 착각할 정도로 나를 닮았고 매우 우량아였다.
1971년 2월에 호주로 오겠다는 아내의 편지
현진이 엄마는 편지에, 늦어도 1971년 2월경에는 시드니로 떠날 준비를 하겠다고 썼다. 나도 아내가 하루속히 호주에 오면 더없이 좋을 일이었지만 당장 돈 준비가 문제였다. 호주에 와서 직장생활 하여 저축한 돈과 이민 올 때 가져온 돈 중에서 남은 것을 합해 약 천여 불이 통장에 있었다.
그런데 아내와 아이가 오면 꼭 필요한 물건이 자가용이었다. 그 나라에 가서 살아보니, 자동차는 사치품이 아닌 생활필수품이었다. 대중교통망이 한국처럼 잘 연결된 것도 아니고, 버스 정류장도 띄엄띄엄 있었으며, 기차역을 이용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곳 사람들 대부분이 자가용을 소유한 이유가 이해되었다.
서울에서 또 편지가 날아왔다. 2월 말쯤 시드니에 도착할 예정으로 모든 절차를 진행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고…, 그야말로 희비의 쌍곡선이 내 머리와 가슴속에서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두렵기도 했지만 호주에서 가족과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결심
그러나 어쩌랴!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어야 할 내 가족인데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호주로 불러와야 할 것 같았다. 조금 더 자리를 잡은 후 부른다고 해도 그 환경보다 더 좋아진다는 보장도 없었다. 나는 서울로 연락하여 예정대로 출국준비를 서두르라고 했다.
이제 가족맞이 준비에 들어갔다. 적어도 방 2개짜리 아파트(Flat)와 중고자동차는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방 구하기를 서둘렀다. 그때 내가 자취하던 지역인 로즈빌은 가능성이 없었다. 이른바, 화이트칼라들이 주로 사는 동네라 대여료가 너무 비쌌다. 방 2칸에 부엌 딸린 아파트 대여료가 일주일에 25불을 초과하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대여료가 25불이면 내 수입의 약 40%를 차지하는 거금이다. 그래서 좀 더 수준이 낮은 지역을 알아보았다.
집을 구하고 자동차를 구하고
가장 중요한 조건은,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곳이 맨리(Manly)라는 해안가 근처였다. 맨리 해변은 일찍이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영화촬영을 하면서 좋은 해변이라고 극찬한 곳이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동네는 거기서는 좀 떨어진 페어라이트(Fairlight)였다. 그곳 역시 넓게는 맨리 지역에 속하지만,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었다. 나는 페어라이트에 일주일당 대여료 25$인 방 2칸에 응접실과 부엌이 딸린 아파트를 구했고, 2월달 식구들이 오는 날짜에 맞춰 계약을 완료했다.
다음 과제는 중고차를 잘 골라서 사는 일이었다. 토요일마다 중고차 시장에 나가서 알아보곤 했는데, 마음에 드는 차는 내 예산을 초과했다. 결국, 찾아낸 중고차는 생산한 지 약 12년 정도 된 일제 코티나(Coatina)였다. 자동차 품질에 대해 모르던 나로서는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시험운전을 해보니 잘 달리긴 했다. 차 가격은 300불로 확정했다. 이것 역시 거금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야 했다. 명색이 나는 한국군 공병장교 출신이다. 공병장교라면 대부분 덤프트럭 운전은 비공식적으로 해본 경험들이 있다. 나도 그 정도의 운전경력이 있던 터라, 우선 운전면허학교에 10시간 운전연습을 신청했다. 운전학교라야, 교습할 사람이 직접 나한테 와서 자기 차로 운전연습을 시키니까 내가 운전학교에 갈 일은 없었다. 대체로 몇 십 시간 연습하는 게 보통이라고 했지만, 시간당 레슨비가 부담스러웠기 10시간만 신청했다. 10시간을 연습해도 불합격될 경우에는 10시간 더하겠다고 강사한테 미리 약속해놓았다.
운전면허증까지 발급 받으며 가족과 함께 살 모든 준비를
운전법규 공부도 해야 했고, 퇴근 후에는 집 앞에서 내 차 코티나로 수없이 주차 연습하고, 강사의 지도를 받으며 10시간 도로주행 연습을 했다. 10시간 연습을 마치자 강사가 면허 시험날짜를 정해주었다. 10시간 훈련 후 운전능력이 많이 부족하면 시험날짜를 안 잡아 줄 텐데,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던 모양이다.
면허시험 보던 날, 공장장에게 조퇴신청을 했더니 그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Good Luck(행운을 빕니다)!”이라고 대답했다. 만약 불합격하면 시험 볼 때마다 공장장한테 조퇴신청을 해야 하는 부담이 컸다. 호주에서의 운전면허 시험은 별도의 시험장이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도로주행을 하면서 태도, 주차, 법규 이해 등을 동시에 확인했다.
일단 도로주행을 통해 코너 돌기, 오르막길 중간에서 주차했다가 재출발하기, 두 개의 차 사이에 주차하기, 신호등 준수하기 등을 실제로 검증하고, 어느 정도 긍정적인 판단이 서면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법규에 대해 질문하는 식이었다. 합격 여부는 전적으로 주 정부 교통국에서 지정한 감독관의 손에 달렸다.
모든 과정을 마친 뒤 감독관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Congratulations(축하합니다)!’ 면허증을 발급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큰 홍역은 치른 셈이었고, 면허증 발급 전에 1년 동안 임시면허증을 발급해 주었다. 그것은, 면허증 발급 시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일종의 조건부 운전면허 경고장인 셈이었다. 만약 그 기간에 교통법규를 위반하거나 사고발생 시 본인의 잘못이 확인되면 즉시 운전면허증을 취소하는 제도였다.
어쨌든 호주의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았다. 지도강사가 격려해 주었다. 단시간 내에 운전면허를 받게 되어 자기도 기쁘다는 인사를 끝으로 가족을 맞이할 세 번째 과제가 해결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