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교회의 식구가 점점 늘어나고 과거 한국에서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교회 운영진으로도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교회 장로를 했다는 B씨가 적극적으로 끼어들었다. 그분은 월남에서 관광비자로 호주에 들어가 불법체류자로 남아있으면서 영주권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던 중이었다. 예배 때 대표 기도자로, 때로는 교회재정 간섭, 변 목사한테도 아주 가까이하며 여러모로 교회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려고 했다. 현재 교회를 운영자들이 너무 지성적이고 집사 경험도 없어 교회다운 모습이 안 보인다며 그가 간접적으로 불평하는 소리도 들렸다. 자연히 한국에서 정식 이민으로 정착한 교인들과 불법체류 교인들 간의 불협화음이 감지되기도 했다.
불법체류 교인들과의 알력
불법체류 교인들은 변 목사에게 눈에 띌 정도로 접근하는 걸 쉽게 느낄 수 있었고, 변 목사 역시 그들의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이해하려고 했다. 점점 정착 교인들과 불법체류 교인들 사이가 분리되는 듯한 묘한 기류가 흘렀다. 변 목사가 해외출장을 갈 때마다 나는 구의두 목사께 설교를 부탁했다. 구 목사는 싫은 내색을 전혀 하지 않고 그때마다 한인교회에 왔다.
어느 일요일 예배가 끝나고 구 목사와 대화하던 중 자신이 시드니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대학교에서 제공하는 아파트로 이사해야 하니, 현재 살고 있는 체스터 힐의 집을 팔겠다고 했다. 주말에 가끔 초청을 받아 방문한 적이 있어서 나는 그 집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 교인 중에 살 사람이 있으면 자기한테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만약 한인 교인 중에서 그 집을 살 경우에는 부동산 소개비, 변호사 비용, 기타 소요되는 비용은 당사자끼리 해결할 수 있다고도 했다.
호주에서는 부동산을 거래할 때 반드시 변호사가 개입해야 하고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당사자끼리 거래해도 변호사비용이 어느 정도는 들겠지만, 시드니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 변호사한테 의뢰하면 거의 안 든다고도 했다. 안 그래도 매주 지급하는 대여료에 조금만 더 투자하면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나는 항상 하고 있었다.
금전적으로 무리였지만 집을 사기로
내가 그 집을 사고 싶어졌다. 은행에 융자조건을 문의하니 집값의 80%까지는 가능했다. 구 목사가 받고 싶은 가격은 삼 만 불이었다. 은행에서 주택융자가 가능했던 이유는 두 사람이 일을 하고 있었고, 주택가격이 시장가격에 못 미치기 때문에 조건이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한 사람 수입은 생활비로 쓰고 또 한 사람의 수입으로는 주택융자금을 갚으면 될 듯했다. 사실은 주택융자제도를 이용하기 위해 그 이전부터 시드니 외곽인 루티힐(Rootyhill)까지도 고려해본 적이 있었다. 루티힐은 시드니 중심지에서 약 60km 떨어진 아주 시골 동네이다.
거기까지도 생각해본 터인데. 구 목사 집은 그보다 절반쯤의 거리로 양호한 곳이었다. 우리는 구 목사의 집을 사기로 하고, 은행에 모든 융자 서류를 제출한 뒤 허가를 기다렸다. 구 목사 집은 단층 기와집에다, 굴데섹(Cul-De-Sec)에 있어서 차량이 많이 다니는 곳이 아니었다. 집 앞마당도 있고, 길 건너에 커다란 공원도 있어서 현진이가 놀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이제 5살이 넘은 현진이는 유치원생이 되었다.
비록 은행융자가 80% 정도 가능했지만, 나머지 20%의 현금이 있어야 했다. 구 목사께 그 부분을 설명하며 시간을 달라고 했더니, 20% 현금은 천천히 돈을 벌어가며 갚아달라고 허락했다. 게다가 20% 현금에 대한 이자는 받지 않겠고, 원금만 갚아달라고 배려해주어 참으로 고마웠다. 은행융자금이 해결되는 대로 우리는 체스터힐로 이사할 준비를 했다. 동시에 현진이도 새로운 유치원으로 옮겨야 했다. 이제 곧 우리가 원하던 내 집 마련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대학원공부와 회사생활 병행의 어려움
그러나 내 회사생활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회사에서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회사 여비서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녀 역시 사심 없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 생각이 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회사에서는 그런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대학원 과정만은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늘 가슴 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회사 일을 가지고 대학원에서 연구하는 자체에 대해 칭찬하는 교인들도 있었지만, 비웃는 교인들도 있었으니 사람 마음이 어찌 그리도 다를 수가 있는지!
그러던 어느 날 오전에 론 베이리 실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회사에서 내 대학원과정에 관해 결정한 내용을 통보하는 순간이었다. 예전 회사에서 그 회사로 옮긴 지 1년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혜택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입사한 지 1년이 되었으니 그 회사에서 근무하려면 일주일에 40시간을 채우라는 것이다. 만일 채울 수 없으면 그 회사를 떠나도 좋다는 일종의 정리해고였다.
기가 막히고, 비통하고 울분이 솟았다. 내가 필요로 하는 대학원 실험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논문을 쓰기 시작한 시점에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날 오후, 나는 한마디 말도 없이 무작정 책 보따리를 싸들고 나와 버렸다. 말하자면, 나 스스로 직장을 사퇴해버린 것이다. 이제 아내의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분통을 터뜨릴 데가 없었다.
현진이가 있는 어린이집으로 찾아갔다. 뜻밖에 일찍 찾아온 나를 보고 현진이는 마냥 좋아하며 내 손을 놓지 않았다. 현진이를 일찍 데리고 나와서 홧김에 장난감을 하나 사서 손에 쥐여 주었다. 장난감을 손에 든 현진이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이리저리 뛰며 좋아하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회사 간부의 통보를 받고 울분에 사표
자,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내일은 내일이고 일단 마음이 무척 홀가분했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은 심정이 싹 사라지고 없었다. 아내가 직장에 다니니 당장 생계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집을 장만한 데다 융자 신청까지 해놓은 상태라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일찍 조퇴하여 현진이와 함께 있다고 아내한테 전화부터 했다. 아내는 ‘퇴근 시간에 자기를 데리러 기차역으로 오라’고 하면서도 평소 웬만해선 회사에서 조퇴하지 않는 내 근무태도로 볼 때 좀 의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퇴근한 아내를 기차역에서 태우고 셋이 집에 가면서 그날 퇴직한 사실을 얘기했다. 아내는 의외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테고 기도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예요.”라고, 당치도 않은 말을 나한테 했다. 나를 위로하는 대답이었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직장을 구할지 답답한 마음이 이어졌다.
집 구매 때문에 은행에서 융자 심사 중이었고, 대학원은 마쳐야겠고, 한인교회 서기 일도 맡은 상태고 등등 여러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교회 일을 맡아서 하다 보니 교인들 간에 일어나는 잡음도 여간 아니었다. 특히, 정식이민 교인들에 대한 불법체류 교인들의 모략이 점점 노골화되어 갔다. 정식 이민 교인들에 대한 이유 없는 질투가 상당 부분 차지했다. 교회 내에서 그런 분위기를 감수하려니 참으로 어려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