쿽 박사와의 만남 (40화)

1976년 여름 어느 날, 올리버 쿽(Dr. Oliver Kwok)이라는 사람의 전화를 받았는데,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쿽 박사는 내가 호주에 처음 이민 갔을 때, 취직을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만난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계이고, 호주에서 태어나 시드니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화학기술자(Chemical Engineer)였다. 그는 ACI(Australia Consolidate Industries) 연구소의 내화재료 시험실(Refractories Lab) 책임자로 나를 면접한 사람이다. 그게 벌써 5년 전 일이었고 그 후에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때 쿽 박사는 나한테 여러 가지를 자세하고 심도 있게 질문하며 자기 노트에 기록하기도 했다. 그때 마지막으로 나한테 한 말은 “기회가 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기 바란다.”였다. ACI 연구소는 민간연구소로서 규모가 아주 컸으며, 시드니 시내와 가까운 워털루(Waterloo)에 있었다. 어떻게 나를 찾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새로 이사한 집으로 전화한 것으로 보아 이미 언급하였듯이 전화부(White Page)에서 찾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쿽 박사와 ACI

쿽 박사의 전화 첫 질문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였고, 가능한 한 빨리 자기를 한 번 만나 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놀랍고도 뜻밖의 일이었다. 나는 언제든지 시간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성질 급한 동양인이고 중국인답게 그다음 주말에 새로 이사 한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그동안의 내 생활을 얘기해주며, 현재는 대학원에서 석사논문 완성에 힘을 쏟고 있다는 말도 했다. 동시에 교사로 재직 중이라는 것도….

쿽 박사는 여전히 ACI 연구소에서 ‘내화재료 및 세라믹과(Refractory and Ceramic Section)’의 책임자로 재직 중이었다. 그런데 나를 찾아온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자기가 최근에 주 정부와 민간회사의 합작연구인 큰 프로젝트를 하나 수주했는데, 프로젝트가 생각대로 잘 진행이 안 된다고 했다.

그 프로젝트의 도자기 접시(Ceramic Dish)나 사발(Bowl) 같은 기물은 주입 성형(Slip Casting)이나 반 압축 성형(Roller Pressing)을 하는 기존 방법을 쓰지 않고, 건조 성형(Dry-Pressing)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건조 성형 기술이 개발되면, 종래의 제조방법보다 공정관리가 단순화될 뿐만 아니라 대량생산이 가능해져서 경제적이라는 말도 했다. 그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5년 전에 취업 면접한 내가 생각났다는 것이다.

기회라는 예감

내가 한국에서 수행했던, 미국 스윈들 드레슬러(Swindell Dresseller) 회사의 건조 성형기술(Dry Pressing)을 이번 프로젝트에 접목시킬 수 있는지를 물었다. 동시에 ACI 연구소에서 자기와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겠냐고 제의했다. 분명히 나는 스윈들 드레슬러 프레스 기술을 보유한 기술자는 아니었지만, 나를 면접했을 때, 미국의 스윈들 드레슬러 기술에 대해서 내가 무엇인가 알고 있을 거라고 오해한 것 같았다.

순간, 내게 온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때 재직 중이던 고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두어야 할 위기에 몰려 있었고, ACI 연구소가 바로 대학원 근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무언가 아는 척할 수밖에 없어서 원료의 수분조절과 강력한 점토를 선택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연구소의 쿽 박사팀에 합류하고 싶다고 했다. 쿽 박사는 연구소에 돌아가서 상사들과 협의하여 다시 연락할 테니 기다리라 하고 그날은 헤어졌다.

한편, 집을 장만하고 보니 할 일이 많았다. 잔디 깎는 기계도 있어야 하고, 시장도 봐주어야 하고, 집안 곳곳을 진공 청소하는 일도 내 몫이었다. 그러나 내 집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즐거웠다.

한인교회는 나날이 교인 숫자가 늘어갔다. 더 큰 예배당이 있는 교회로 옮겨야 할 상황에 이르렀을 때, 변 목사가 지금의 교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큰 교회당을 안내해 주었다. 그러나 그곳도 교인 수가 넘쳐서 변 목사가 다시 자신이 살고 있던 스트라스필드(Strath Field) 지역의 예배당을 주선했다. 더 큰 교회로 옮기는 것에 누구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한인교회와 변조은 목사

그때부터 변 목사는 호주교회 전체를 흔들고 있던 연합교회에 한인교회도 합류하자고 직‧간접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Y 교수를 비롯한 불법체류자들이 적극적이었다. 불법체류 교인들 대부분이 월남 종전을 기점으로 대거 몰려온 사람들이라, 교회에 출석하면 교인이라고는 해도 상당수는 교회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자기들 살길을 위해 교회 이름으로 관계기관에다 사면을 위한 진정서도 제출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들끼리 사면정보를 교류할 수 있는 곳도 한인교회였다.

또한, 변 목사 자신도 그들에게 자의든 타의든 정신적인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인교회가 호주연합교회에 대해 모르면서도, 변 목사가 그 운동에 앞장서는 것만으로도 한인교회의 호주연합교회 가담은 대세였다.

변 목사는 암암리에 한인교회의 호주 연합교회 합류에 관한 얘기를 꺼냈고, 교회예배를 주관하는 Y 교수, 한국에서 교회 장로 직분을 했다는 B씨를 포함해 예전의 교회 직분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같은 목소리를 내며 여론몰이를 해갔다.

우리가 더 큰 교회로 옮겨야 하는 것에 누구도 반대할 수 없었지만, 굳이 연합교회로 합류하는 것에 대해 약간씩 반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인교회가 무조건 호주 연합교회에 합류하는 것에 반대한 교인들은 나를 포함하여 한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로서, 대부분 한국의 장로교회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한인교회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여서 우선 큰 교회인 스트라스필드 연합교회(Strath Field Uniting Church)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호주 연합교회 멤버는 아니었지만, 사실상 변 목사가 한인 연합교회로 수순만 밟으면 되는 상태였다.

교인 숫자가 몇 백 명에 이르렀다. 호주에 한인교회가 있으니 이제 담임목사 초빙문제도 거론되기 시작했다. 변 목사는 그때도 호주 장로교단 총무였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한인교회는 그분의 파트타임(Part-Time) 역할이었고 나머지 교회 일은 나와 Y 교수 몫이었다.

나는 여전히 교회 서기로 바깥일을 하고 Y 교수는 예배 전반에 관한 일을 맡았다. 물론, 여기에서는 운영위원회가 장로교회의 당회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므로 운영위원들의 목소리도 상당히 높았다.

어느 날부터 한인교회를 담당할 한인 목사 초빙 문제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시드니에서 사위와 딸이 최초의 한인교회를 설립한다는 소식을 접한 처가에서 다량의 찬송가와 성경책을 항공편으로 보내주신 적이 있었다. 장인, 장모님께서는 하나님 일이라면 묻지도 않고 도와주셨다. 우리가 한인교회 설립에 큰 역할을 맡은 것에 대해 대단한 일로 여기시며 편지 보내올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큰 상을 내려주실 것을 믿고 열심히 섬길 것을 독려하셨다. 더구나 처남이 군에서 제대하여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려던 참이어서 어쩌면 이곳 한인교회에서 시무 및 신학공부도 하며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다.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변 목사를 비롯한 교회 운영위원 몇 분에게 처남의 초빙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무반응에 나는 말을 꺼낸 자체를 후회했다. 사람의 마음을 내가 너무 몰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