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취업
그러던 중 퀵 박사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가 나한테 약속한 날짜보다 2주나 지났기 때문에 ACI 연구소의 꿈도 사라졌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퀵 박사는 가능한 며칠 내로 ACI 연구소로 출근하라며 축하해 주었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인도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자나 깨나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양가 부모님, 한인교회가 시끄럽든 말든 새벽마다 기도하는 아내, 그리고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늘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나 자신이 힘을 모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더는 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논문 완성을 위해 부족한 시간과 자료수집의 어려움 등 여러 문제가 동시에 해결될 수도 있는 기회였다.
연구소에서 근무하면 직·간접적으로 논문 완성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가톨릭고등학교 교장 선생님께 사직서를 보냈고, 교장 선생님께서는 전화로, 시간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해 미안하다고 하셨다.
나는 연구소를 찾아가 퀵 박사를 만났다. ACI 연구소답게 규모가 꽤 컸다. 연구원들이 분주하게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고, 각종 연구 기자재들도 눈에 띄었다. 집에서 연구소까지는 자동차로 약 1시간 정도 걸렸다.
그때 서울에서 소식이 왔는데, 부모님의 이민 수속이 완료되어 ○○월 ○○일 시드니에 도착하신다는 내용이었다. 다행히도 내 집이 마련된 상태였고, ‘연구소’라고 하는, 비교적 지식인들이 모인 직장에 취직이 된데다가 아내도 시내에 위치한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만 오시면 현진이 문제도 해결될 테고, 여러 가지로 우리의 이민생활이 정착되어 가고 있었다.
부모님의 이민 합류로 한결 안정된 생활
부모님께서는 이민 가방 식으로 특이하게 짐을 꾸려 옷가지며 한국의 전통음식까지 싸들고 아주 오셨다. 방이 3개여서 부모님께서 방 한 칸을 쓰시는 데에 별문제가 없었다. 꽤 넓은 마당 뒤쪽 텃밭에서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채소를 가꿀 수 있었다. 현진이는 처음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와도 곧 친해졌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할 수 있었다. 연구소로 옮긴 후에 모든 업무를 다시 배워야 했고 사람들도 사귀어야 했다.
같은 연구실 옆 책상에서 근무하던 연구원의 이름은 로드 쥬드(Rod Judd)였고, 나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호주에서 대학교를 졸업한 호주사람이었다. 말의 속도와 행동이 느리긴 해도, 질문하면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는 나한테는 친절했지만 퀵 박사한테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래도 검은 머리의 중국인이 자기 상사라는 것에 백인의 자존심이 작용한 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퀵 박사의 탁월한 지도력이 동양인과 백인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갈등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퀵 박사의 나이는 훨씬 어렸지만 언어 능력, 보고서 작성, 상부에 보고하는 능력 등 모든 것들이 부러울 만큼 뛰어났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나를 대하는 태도와 로드 쥬드를 대하는 태도는 달랐다. 나하고 영어로 소통이 잘 안 될 때는 몇 번이고 반복하여 반드시 일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나의 업무는 건조 성형(Dry-Pressing) 개발
퀵 박사의 프로젝트에서 내가 집중적으로 해야 할 업무는, 도자기의 주입 성형(Slip Casting)을 대체하는 건조 성형(Dry-Pressing) 개발이었다. 그것은 기계로 상하운동을 하면서 압축(Pressing)하는 일반적인 제조법과 상·하, 옆면, 즉 3축 방향에서 압축하는 다소 특수한 제조법의 두 가지가 있다. 퀵 박사의 프로젝트인 성형개발은 3축 성형방법을 택하되, 가장 경제적인 방법을 찾아내자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 3축 방향 성형은 기계 자체도 고가품이고, 고압이 적용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Powder(예: Alumina)로 고급 제품을 제조할 때 사용한다. 따라서 3축 방향 압축으로 제조된 제품은 고가 품목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다.
고가품이 아니고 고압 성형도 아닌 일반 접시나 사발 제품을 3축 성형으로 하되, 비싸지 않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 특별 프로젝트의 목적이었다. 3축 방향 성형은, 수분을 섞지 않는 대신 소량의 결합재(Binder)를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랬을 때, 3축 방향 성형을 가장 경제적이고 저렴하게 제조하기 위해서는 값비싼 결합재를 사용하지 않아야 하며, 결합재 대신 최소한의 수분을 이용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여기에다 3축이라 할지라도 압력을 최소한으로 낮추어 시골 방앗간 정도의 압력을 택해야 하는 점도 해결해야 할 사안이었다.
가장 낮은 압력에다 최소한의 물기 정도로 혼합해서 3축 방향으로 압축한다면, 전통적인 도자기 원료로는 그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이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원료에 최소한의 수분을 넣어주면 그 수분을 흡수하고 있다가 3축에서 압력을 받을 때 수분이 다시 빠져나오면서 결합력을 생성하여 접시가 성형되어야 한다. 따라서 수분흡수성과 점력이 있는 원료를 찾아야 했다. 말하자면, 수분을 흡수하는 동시에 점력도 갖출 수 있는 그 어떤 원료가 있어야 했다. 그 원료를 혼합하여 접시가 성형되더라도 소성을 할 때 용융 결합성이 있는 원료들도 찾아서 처음부터 일을 시작하는 방향으로 정리했다.
퀵 박사는 도자기 제조에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수분-압력-원료의 삼각관계를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다. 내가 그런 삼각관계를 쉽게 고안했던 이유는, 한국에서 미국 스윈들 드레슬러 회사의 건조 성형 기술로 타일을 제조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수분을 함유하는 동시에 점력도 가지고 있는 원료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런 특수성을 동시에 갖출 수 있는 원료로는 규조토(Diatomaceous Earth), 팽윤성 점토(Vermiculite), 팽창성 점토류, 유기성 토양(Black Earth) 등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자체 내에 미세한 기공이 있으며 물기를 만나면 자기 몸의 몇 배를 흡수하는 능력이 있다. 그중에서도 결합력은 약하지만, 흡수성이 뛰어난 규조토를 선택했다. 규조토는 호주에도 대량 매장되어 있고 특수 광물질에 해당한다. 규조토란 수억 년 전에 식물이 땅속에 갇혀 화석으로 변질한 일종의 식물성 모래로 알려져 있다. 조직 내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공이 들어있어 손쉽게 수분을 흡수할 수가 있으나 단점은 점력이 아주 약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이 규조토를 이용하여 압축성형에 도움이 되는 다른 점력을 가진 점토와 조절하기로 하였다. 규조토는 탁월한 흡수성 때문에 주로 동물들의 배설물을 흡수하는데 사용되고, 토양의 수분 조절용 보습 재료도 사용되고 있는 광물이다. 나는 도자기 원료에 규조토를 사용해 우리가 원하는 접시를 압축 성형하여 그런대로 성과를 거두었다. 퀵 박사는 규조토를 이용한 내 제안에 대단히 만족해했다. 정해진 연구기간 내에 이렇다 할 성과를 못 내고 있던 답답함이 풀렸다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이민 초기보다 윤택한 생활
접시 압축성형 프로젝트는 상당기간 연구가 계속되었으며, 나는 다른 프로젝트에도 참여할 기회가 점점 많아졌다. 연구가 계속되는 동안 내 대학원 논문이 마무리되어 갔다. 보충 실험을 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도 조금 생겼으며, 논문 정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나에게 퀵 박사는 가능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내가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동안 가장 도움이 된 것은, 자료를 얻기 위해 굳이 대학교 도서관에 가지 않고 연구소 내의 도서관에서도 해결이 가능한 점이었다. 게다가 친구처럼 친해지던 로드 쥬드도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고, 퀵 박사 역시 내 논문 준비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모든 일이 잘되어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대학원 과정에서 어려운 고비들을 넘길 수 있도록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집에 계시니, 현진이가 유치원에 다니는 것도, 끝나고 집에 가 있는 것도 문제가 없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다. 아내와 나의 월급으로 이민 초기보다는 생활이 윤택해졌다. 토요일마다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실험실에서 논문 준비에 매달렸었는데, 이제는 그 시간에 가족과 공원을 찾는다든가, 가끔 L 씨 집에도 가서 교민사회의 동요와 M 사장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L 씨 가족과 M 사장의 관계는 여전히 냉랭한 상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