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대학생활 중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우리 학과에는 여학생 3명이 있었는데, 각각 강원도, 전남 순천, 서울 토박이였다. 그중 순천 출신 여학생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누구나 이 순천 여학생한테 접근하고 싶어 했지만, 애교도 없고 말도 없는 편이라 남학생들의 접근이 쉽지 않았다. 순천지역에서 유학 와있는 부잣집 남학생들과는 같은 고향이라 가까이하고 있었지만, 서울을 비롯한 기타 지역 학생들은 그 여학생에게 관심이 있어도 가까이는 못 할 정도로 꽤 인기가 있는 여학생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나는 그 순천 여학생과 말을 주고받을 기회도 있었고, 같은 전라도 동향이라 가끔 실험 리포트도 상의했었다. 어떤 때는 그녀가 사는 행당동 하숙집까지 데려다 준 걸 보면, 그 여학생이 가깝게 여겨졌었나 보다. 그러나 내 형편상 다방에서 커피 한 잔도 사줄 수 없었기에 학교에서 만나도 그저 사무적인 대화 정도였다. 그리고 내가 그 여학생과 이야기를 나눌 때, 다른 학생들한테 오해를 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때때로 그 여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다른 학생들이 보기도 했다.
4학년 여름이었다. 마지막 ROTC 병영 훈련을 마치고 2학기 첫 강의에 들어가다가 정문 입구에서 그 여학생을 만났는데, 그쪽에서 오히려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내 얼굴이 시커멓게 탔다느니, 여름 군사훈련이 어렵지 않았는지, 군사훈련 마치고 언제 고향에 다녀왔는지, 2학기 등록은 마쳤는지 등등 대화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같은 학과 학생끼리의 평범한 대화에 불과했지만, 그 무렵에는 혼자 오해하며 즐기기도 한 것 같다.
다시 교내 병영과 마지막 학기 수강, 아르바이트 생활이 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대학생활이 끝나는가 싶더니 어느덧 ROTC 병영 생활도, 마지막 임관 절차 시험도 끝났다. 내가 아르바이트로 지도했던 학생들은 꿈 많은 여고생들이 되었다. 이제 육군 소위로 임관만 하면 나는 서울 자취생활에서도 해방되는 것이었다.
1965년 2월, 나는 어렵게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고, 동시에 육군 소위로도 임관했다. 형설의 공을 쌓았는지는 둘째고, 첫째는 육군 소위로 임관하는 날부터 적어도 얼마의 월급이 내 손에 들어온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학사 졸업식과 임관식 때는 목포에서 아버지가 올라오셔서 빛나는 소위 계급장을 만져 보신 기억이 난다. 처음 입어 본 장교 복장에, 금테 두른 정모와 검은색 장교 가방…. 모두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공병은 골병이라는 말도 있듯 나는 공병 병과를 받았지만, 누구보다도 군 생활을 하고 싶었다. 학생 생활이 지긋지긋했기 때문일 것이다. ROTC 임관 장교들은 몇 주 동안 집에서 쉬다가 다시 자기 병과 학교에 입교하여 12주 동안 병과 훈련을 받게 되어 있었다. 나는 육군공병학교가 위치한 김해로 가기 전에 먼저 고향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등록금 때문에 시외전화를 했을 때 우리 집에 연락하느라 수고해 주신 통나무 제재소 사장님인 성호 아버지를 우선 찾아뵈었다. 귀찮게 여기지 않고 내 전화를 받아주셨기 때문에 오늘 내가 졸업과 동시에 임관할 수 있었다고 인사드렸다. 장교 제복을 입은 내 모습을 보시면서 성호 아버지는 인사드리기 전부터도 이미 나를 많이 칭찬하셨고, 부모님께서는 나를 대견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목포에 몇 주 있는 동안 친척들과 내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도 인사드렸다.
나는 12주병과 교육차 김해 공병학교에 갔다. 공병장교들에게 공병에 관한 교육과 군사교육을 같이 시행하는 훈련과정이었는데, 그리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과정이 아니었다. 전국 대학교에서 모여든 초보 공병장교들과 시간이 갈수록 차츰 익숙해졌다. 내 주변에는 서울대, 동국대, 전북대, 전남대 등 타 대학 출신들만 있었고, 우리 학교 졸업생은 없었다.
부산지역에서 온 교육생들은 주말에 그들의 집으로 쉽게 갈 수 있었지만,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그저 부산 인근으로 외출하는 정도였다. 애인이 있는 교육생들은 외출이 잦았지만, 나는 고향도 먼 데다 애인은 더더욱 없었기에 느지막하게 부산 해운대에 나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 먹고 복귀했는데, 그게 문제였다.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고 부대에 복귀하면 바로 기다리고 있는 단체 구보 훈련! 구보란 뛰는 훈련이다. M1 소총이 미군들의 체력에는 적당하다지만 우리 체격에는 무겁기로 악명 높은 개인 화기인데, 복귀 후에 그 무거운 M1 소총을 어깨에 메고 군가를 부르며 몇 십 리를 뛰려면 배가 불러서 쉽게 뛸 수가 없었다. 차라리 배가 고플 때 뛰는 게 낫지, 그것은 기합 중에서도 가장 큰 기합이었다. 그 상태에서 소리소리 지르며 몇십 리를 달리고 나면 정신이 나갈 정도로 힘이 들었다. 그러다 차츰 요령이 생기면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날 유혹해도 복귀 직전에는 극도로 조심하게 되었다.
그렇게 힘든 훈련이 계속되는 중에도 월급이라는 것을 손에 쥐었을 때의 뿌듯함을 잊을 수가 없다. 월급 일부는 집으로 보내고 일부는 저축하니 마음이 이중으로 흐뭇했다.
공병학교 교육과정을 별 탈 없이 모두 마치고 처음 배속 받은 부대는 용문사 근처에 있는 ○○○○ 야전공병단이었고, 그 야전공병단에서 다시 예하 부대로 명을 받은 곳은 경기도 가평에 있는 공병 ○○○ 대대였다. 그 대대는 청평강 근처에 주둔하고 있어 제법 한적했는데, 그때는 최전방에 속할 만큼 아주 먼 거리로 불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후, 막 자리를 잡으려는 순간에 다시 전속명령이 떨어져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