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행남사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다시 호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쿠퍼 사장의 남은 일정은 행남사 유 부장에게 맡기고 나는 곧 처가로 갔다.
너무나 반가웠고. 장모님께서는 내가 아내와 함께 오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셨다. “지금의 내 위치상, 다음 기회에 같이 한국에 오겠다.”고 위로해 드리고, 그동안 호주에서 지낸 일들을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장인, 장모님께서 시드니에 며칠 다녀가셨지만,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모르고 계셨다. 만남의 시간은 너무 짧았고, 내가 호텔로 돌아갈 때쯤 이것저것 담아 봇짐을 싸주셨다. 그분들께 용돈을 드려야 할 처지임에도 빈손으로 와버린 내게, 아내한테 주라며 용돈을 챙겨주시기도 했다. 참으로 감사했지만, 나 자신을 책망하며 헤어져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 집 형제들을 만났는데, 호주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의 안부와 영주권에 대한 질문이 전부였다. 나는 가능한 이민초청을 해보겠다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호주 이민생활에서 가족 수가 많은 것이 좋은 것은 사실이다. 이민초청이 가능하면 모두 초청하겠다고 약속한 후에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또 한 분을 급히 만나야 했다. 바로 윗동서였는데, 그분은 연세대 공과대학 화공과 출신으로, 당시 인기 좋은 동신화학의 기술자로 재직하고 계셨다. 그러나 회사 사정이 갑자기 나빠져서 전망이 어두우니 역시 호주로 이민 가기를 원하셨다. 화공 기술자는 호주에서도 필요로 하는 직종으로 알려졌었다. 더구나 그분은 폴리머계통(고무계통)에서 연구개발 중이어서 충분히 초청 가능한 경우로 생각되었다.
친지들을 만나고 호주로의 귀국 길에
1977년대의 우리나라는 후진국이었고, 조금이라도 더 잘살아 보려고 너 나 할 것 없이 발버둥치던 시대였다. 또한, 북한이라는 특수 집단과 항상 대치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능하면 외국으로 이민 가고 싶어 하던 시대였다. 더구나 호주로 이민을 가거나, 그 나라에서 영주권을 가지고 산다는 자체가 출세를 의미하는 시절이기도 했다. 외국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숨통을 틜 수 있는 한 방법이라 할 만큼 한국의 사정이 어려웠다.
한국에서의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다시 호주로 돌아가려니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내 가족이 있었고, 내가 목표하는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다시 비행기를 탔다. 한국에 머문 일주일이 마치 하루 같았다. 호주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내가 소식을 전해주었다. 며칠 전에 시드니에서 대학교 친구라는 사람이 전화하여 나를 찾더라는 것이다. 남자 목소리가 가늘면서 여자 목소리 같기도 하고 순수한 서울 말씨로 들리더란다. 그때 바로 떠오른 친구가 있었다. “이름이 뭐래? 혹시 김용규 아니야?”라고 내가 되묻자 아내는 그 사람이 맞다고 했다. 왜 하필 김용규라고 생각했을까? 그 친구는 좋은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부인도 대학교 교수라는 소식을 한국에 있을 때 들었는데…. 혹시 다른 사람일까? 그 친구라면 이민을 선택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가 대학교 시절부터 늘 외국 서적을 끼고 다녔고, 외국인과 회화연습도 많이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 친구 집에서 삼양 마가린과 비스킷을 먹을 정도로 가깝게 지낸 사이였기 때문에 용규가 외국에 대해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 친구도 외국에 나가리라는 예측도 했었다. 내가 한국에서 돌아오면 자기한테 연락해 달라고 아내에게 전화번호를 남겨놓았기에 바로 전화를 했더니 바로 그 친구였다.
이미 얘기했지만, 김용규는 고려대 화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전공이 맞지 않다고 중퇴하고 다시 해군사관학교를 또 자퇴하여 특수전공을 찾아 요업학과에 입학한, 재능이 아주 뛰어난 친구이다. 대학졸업 후에도 ‘대한도자기’라는 굴지의 요업회사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은행 전산실로 옮긴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김용규란 친구의 호주 이민
사실, 대학 시절에 서울 효제동의 그 친구 집에 놀러 간 적도 있고, 그 친구도 내 자취방에 들락거리며 함께 밥을 먹기도 했었다. 너무나 보고 싶은 그 친구를 호주에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노릇이다. 대학졸업 후 그 친구와 직접 연락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호주에 와 있는 내 전화번호까지 알고 연락을 하게 됐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만나서 차츰차츰 경위를 알아보기로 하고, 그가 임시로 거처하는 킹스 크로스(Kings Cross)로 차를 몰았다.
드디어 우리는 만났다. 그 친구는 가족 모두 그곳으로 이민을 왔다고 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호주에서 영주하게 된 경우였다. 부인은 소문대로 서울의 SJ대 교수로 재직 중이었고, 김용규 자신도 은행 전산실에서 직장생활을 했음에도 그 좋은 환경을 일시에 털어버리고 황량한 이민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친구를 도울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파트를 구할 때나 살림 도구를 구매 시 그저 길을 안내하는 정도였다. 동시에 한인 장로교회로 인도하여 일요일 예배를 함께 드리게 되었다. 그 친구는 원래 교회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김용규 모친께서 독실한 불교 신자였고, 그의 형님 역시 불교의 절대 신앙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계시다고 학창시절에 내게 얘기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에 내가 교회에 갈 때, 용규는 다른 친구들과 야외에 놀러 갔었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나는 용규에게 호주 이민생활에 대한 내 경험을 들려주었다. 이민생활은 황량한 전장에 투입된 갈 곳 잃은 병사의 삶과도 같으니, 살아남을 길을 택하여 각자가 약진하는 수밖에 없다고 얘기했다. 용규는 좀 실망한 듯한 표정이었고 내가 먼저 와서 겁주는 걸로도 느꼈겠지만, 실제 내가 겪은 그대로였다. 우리는 매주 한 번씩 교회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날은 헤어졌다. 그리고 가끔 전화로 근황을 물어보는 정도에 그쳤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민생활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고도 했다.
딸, 명진의 출생
1977년 5월 28일, 딸이 태어났다. 현진이는 남자 동생이 태어나면 축구와 크리켓을 함께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무너졌고, 나 역시 그런 기대를 했었다. 사내들끼리 또는 여자들끼리 더 잘 단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말이다. 어쨌든 예정일에 맞춰 순산하여 기뻤다. 아내와 갓난아기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부모님 역시 아들이길 기대했던 터라 무덤덤한 표정들이었지만, 산후조리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다.
딸의 이름은 옆집 아주머니께서 “이 아이가 집안에 기쁨을 줄 것이 확실하니 이름을 Joy로 하라.”고 지어주셨다. 우리도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왠지 그 아이로 인해 집안에 기쁜 일들이 찾아들 것 같은 믿음이 생겼고, 6년 동안이나 망설이다 얻은 아이였기에 사실 기쁨 그 자체였다. Joy를 한국어로 바꿔보니 밝을 명(明)자가 비슷한 느낌이 들었고, 현진(賢眞)이와 남매라는 점에서 진(眞)자를 선택했다. 아이 이름이 영어로 Joy, 한국어로는 명진이가 된 것이다.
명진이는 비교적 낮잠을 잘 잤지만, 밤에는 자주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아주 건강하게 잘 자랐으며, 현진이는 초등학생으로, 건강하고 친구들도 많아지면서 학교생활을 아주 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