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은 몹시 차가웠고, 서울 아가씨들의 말씨는 방울이 굴러가듯 낭랑하여 들을수록 더 듣고 싶은 매력이 있었다. 나는 청량리 철도 부근에 사는 먼 친척 집에서 두어 달 지내면서, 본격적으로 자취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방을 구하며 아르바이트라는 생소한 일거리도 찾아봐야 했다. 서울 지리를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버스와 전차를 이용해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니 별문제는 없었다.
그러다 다행히 자취방을 구할 수 있었고, 책상 겸 부엌살림 보관용으로 사과 상자를 준비하여 차츰 타향살이에 익숙해져 갔다. 다행히 아르바이트 일도 구했는데, 당시 서울에서 말썽꾸러기로 알려진 남산 부근 K여중 3학년 학생 그룹의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14~15세 정도의 다 큰 처녀들이었는데, 그룹의 한 학생 집에서 칠판과 장소도 제공해 주어 나는 마음 편히 수업 준비를 열심히 할 수 있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지도하다 보니 경험도 쌓이고 학생들 성적도 비교적 향상이 되던 차에 학부모 한 분이, 그냥 자기 집 문간방으로 들어와서 가르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셨다. 뜻밖에 좋은 선물을 받은 느낌으로 나는 곧바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자취 겸 그룹과외 지도를 하게 되었는데, 이전의 생활보다는 여러모로 훨씬 좋은 환경이었다.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들 중 여유롭게 생활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자취생이 시골에서 보내주는 음식에 의존했고,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는데, 가끔 어머니께서 보내주시는 젓갈류가 유일한 반찬이었다. 젓갈류에다 고춧가루, 파, 마늘을 적당히 섞어서 무쳐 먹으면 고기반찬에 버금가는 맛이었다. 생각나는 젓갈류는 잘 익은 멸치젓과 송어젓인데 생각만 해도 군침이 흐를 만큼 맛있는 반찬이었다. 지금도 갓 지은 밥에다 묵은 김치와 젓갈을 넣고 비벼 그때 그 맛을 살려보려고 하지만, 도저히 같은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20대 청년 시절에는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졌다. 늘 배가 고프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추운 겨울, 찬밥 덩어리에 김치 가닥을 얹어 먹는 그 맛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자취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나는 대학생활을 바쁘게 보냈다. 자취생활 정도는 어찌어찌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대학등록금 납부 시기가 되면 내 수입으로는 그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께 편지를 써야 하는 마음이 항상 무거웠다. ‘아버지 전상서’로 시작하여, 결국은 등록 마감 일자와 저축해놓은 돈이 지금 몇 푼 안 남았다는 사실과 돈을 좀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죄송스런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마찬가지다. 일류대학에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부모님께 등록금 타령만 하는 것 같아 내 처지가 처량하기도 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 혜택도 받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좌절감도 있었다. 여러 가지로 부모님께 늘 죄송스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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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양대 공대 외경(현재) / 나는 1961년 한양대 공대 요업공학과에 진학하며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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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남들은 미처 못 하고 있는 첨단재료 분야를 전공한다는 뿌듯함과 자신감 같은 것도 한쪽 가슴에 도사리고는 있었다.
실제로 대학에서 배우는 과목들은 첨단재료 공학이라기보다 전통요업 정도였다. 하기야, 그때는 첨단 세라믹스를 전공한 교수도 드물던 시절이었는데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항상 곧바로 집에 와서 몰려오는 학생들 지도에 대비해야 했다. 내 공부에다 과외지도 준비, 자취 살림까지 해야 하니 시간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일까? 대학 시절에 친구가 없었다는 것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 당시 대학생들이 즐겨 찾은 곳은 음악다방, 당구장, 극장 등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즐길 만한 여유가 없었기에 모른 척 외면해버렸다. 시골에서 가끔 보내주시는 음식과 등록금, 집안 소식이 유일한 낙이었다.
학교에서 내 자취방까지는 빨리 걸으면 약 40분 정도 걸렸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면 시간이 덜 걸리지만, 교통비가 두 배로 드니까 주로 걸어 다녔다.
대학 등록금 납부 기간에 등록금이 오지 않으면, 우체국에 가서 교환을 통해 시외전화를 또 걸어야 했다.
시골의 우리 집에는 전화기가 없어서 우리 집 맞은 편 통나무 목재공장으로 전화하여 제재소 직원이 우리 집에 전해주면, 아버지나 다른 식구들이 제재소로 가서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귀찮았지만, 그렇게 연락을 해서라도 등록금을 재촉했던 기억이 난다. 때로는 등록 시기를 놓치기도 하고, 등록 마감 직전에 가까스로 납부한 적도 있었다. 어쨌든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음이 틀림없다.
한 번은 밥을 지으려는데 식량(식량이라고 해봤자 보리, 조, 쌀이 섞인 혼합곡식)이 떨어지고 없어 아침밥을 굶은 채, 학교 구내식당에서 달걀 두 개를 사서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며 먹었던 생각도 난다.
어떻게든 빨리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직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사실만 거듭 확인할 뿐이었다.
그럭저럭 2학년 후반기가 되었고, 학교 게시판을 보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국가에서 처음 시행하는 ROTC에 대한 설명이었다. 지원자격은 ‘전 과목 평균 B학점 이상 남자’ 라니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나는 학적과에 열람 신청을 하여 2년간의 내 평균 성적을 확인해 보았다. 특별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성적은 아니었지만, ROTC에서 요구하는 성적보다는 훨씬 웃돌아서 지원서를 제출하고 면접도 보았다.
ROTC 본부에서는 신체검사 통지서와 함께 장교 후보생임을 확인하는 통지서를 보내왔다. 나는 마치 대단한 통지를 받은 듯 가슴이 설렜다. 졸업과 동시에 장교로 복무하면 바로 취직이 되는 것이고, 기다리던 소정의 월급도 나오게 될 테니 달걀 두 개로 끼니를 때우며 깨달은 교훈이 알차게 열매 맺는 듯했다.
